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Klaus Jun 07. 2023

인어공주는 흑인일 수 있는가?

허구주의에 기초한 '흑인 에리얼'의 가능성

0.     들어가기 전에
 미리 밝힐 점은 나는 이번에 개봉한 영화 <인어공주>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품 자체에 큰 관심이 없어서 아마 앞으로도 보지 않을까 싶다. 안 본 영화를 두고 잘 만들었네 못 만들었네 하는 잔소리는 적절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둘러싼 논란에 끼어들 자격까지 박탈시키는 것은 꽤나 가혹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심스레 이 글을 쓴다. 
 
 

1.     논란: 에리얼은 흑인일 수 있는가?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세력과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 사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고 있는 와중에 인어공주 에리얼의 역으로 한 흑인 배우가 낙점되자마자 논란은 시작되었다. 옹호하는 쪽은 에리얼이 흑인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반대하는 쪽은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 나는 ‘흑인 에리얼’이라는 한 가능성 자체에 흥미를 느껴 이 글을 적게 되었다. 별도의 윤리적 판단 없이, 허구적 존재자를 다루는 ‘허구주의(fictionalism)’에 대한 기본적 입장을 바탕으로 이 논란에 참여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입장은 확고하다. 에리얼은 흑인일 수 있으나, <인어공주>의 작품을 올바르게 그려내는 방식은 아니다.
 
 

2.     허구적 존재자로서 에리얼
 우리 세계는 존재로 채워져 있다. “이 책상 위에 사과가 있다.”는 문장에는 ‘책상’과 ‘사과’가 있으며, 둘 사이는 ‘~ 위에 ~가 있음’이라는 관계가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존재하는 것들 투성이다. 반대로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어떠한 언급도 할 수 없다. 유니콘의 발톱은 무슨 색깔일까? 이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유니콘은 현실세계에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오래전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철학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버트란트 러셀의 그 유명한 문장,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은 참인가? 정답: 참도 거짓도 아닌 무의미한 문장이다. 러셀에 따르면, 이 문장은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일 뿐, 기술구(description)로 이루어진 언어 덩어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러셀은 그의 기술 이론을 통해서 철학의 아주 오랜 문제, 비존재자 지칭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따라서,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에리얼 또한 여기에 따르면 그냥 무의미한 기술구 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다. 문제 끝. 


하지만 늘 그렇듯이, 철학적 문제는 밑도 끝도 없다. 아마 그렇기에 철학이 매력적 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프랑스 왕’의 경우와 달리, 우리가 ‘에리얼’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그녀가 정말로 존재하는 듯한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에리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에리얼에 대해 이러저러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에리얼은 인어다.” 이 문장은 참인가? 참이다. 진리값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꾸어 말해, 이 문장은 러셀 식의 기술구 덩어리 만으로 이해하기는 조금 불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에리얼이라는 허구적 존재자가 있다는 인식 하에 이 문장을 참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에리얼은 백인/흑인이다.”라는 문장 또한 진리값을 가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허구적 세계 속의 에리얼이 정말로 존재하는 한 마땅히 특정 인종에 가까운 모습으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나는 여기서 ‘존재(existence)’ 또는 ‘있음(being)’을 두 가지의 의미로 나누고자 한다. 현실세계에 없다는 의미에서 에리얼은 존재(existence)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리얼은 단지 현실화(actualization)되지 않았을 뿐이다. 허구적 세계에서 에리얼은 있다. 우리는 에리얼이 인어라는 것이 참이며, 공주라는 것도 참이라는 것을 안다. 단어 ‘에리얼’에게 ‘인어임’ 혹은 ‘공주임’ 등의 참인 술어를 올바르게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에리얼은 있다(being).
 
 

3.     비판 (1): 에리얼이 흑인이어도 괜찮다는 순진한 믿음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 데이빗 루이스는 다소 골 때리는 주장을 한다. 그는 우리가 가능성을 생각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하는 ‘가능세계(possible world)’가 정말로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허구적 존재자도 다른 어떤 가능세계의 실제 거주민이다. 바꾸어 말해, 현실세계에서는 아니지만, 어떤 가능세계에서 에리얼은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정말 실재하는 것이다. 다만, 안데르손은 상상가능성을 통해 그 인식적 접근을 부여받아 <인어공주>를 집필한 것이다. 


 물론 그의 이론은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점은 분명하다. 허구적 존재자는 최소한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즉 허구세계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허구세계를 어떻게 이해할지는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 문제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나는 허구적 존재자에 대한 특정 문장의 진리값을 부여하는 허구적 상황 및 담론의 총체 정도로 이해하고자 한다. 쉽게 말해, 에리얼이 이러저러한지는 에리얼이 사는 세계에 의존한다는 의미로 허구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에리얼이 흑인이어도 상관없다는 의견 중에는 이러한 주장이 있다. “아니, 어차피 허구적 인물인데, 흑인이면 어떻고, 동양인이면 어떻냐?” 그렇지 않다. 에리얼에 대한 문장의 진리값은 현실세계가 아닌 에리얼이 속한 허구세계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우리는 “에리얼은 공주다.”라는 문장은 참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에리얼이 있는 그 세계(아틀란티카)에서 우르슬라나 세바스찬에게 “에리얼이 누구야?”라고 물어보면 “아! 그 인어공주!”라고 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에리얼은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이다.”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이 문장이 사실인지 트라이튼이나 에릭 왕자에게 물어봐도 그들은 애초에 공화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차피 허구적 인물이기에 에리얼이 흑인이어도 상관없다는 의견은 바꾸어 말해 에리얼이 윤석열이어도 상관없다는 의견과 그 논리적 맥락이 같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윤석열 대통령이 에리얼을 연기하는 순간, 좌우 진영과 상관없이 모두가 “#NotMyAriel”을 외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리얼이 정말로 백인인지 흑인인지를 알기 위해 그 허구세계를 탐구해야만 한다. 
 
 

4.     비판 (2): 에리얼은 무조건 백인이어야만 한다는 고집 
 일단 현실세계는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세계를 넘어야 하는데, 우리는 단순히 차원 도약을 통해 에리얼이 거주하는 허구적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세계’라는 개념은 (데이빗 루이스의 이론을 제외하고는) 진짜로 존재하는 현실세계와 같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상상/사고하는 방식 정도이기 때문이다. 즉, 에리얼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인어공주>라는 텍스트에 펼쳐진 다양한 맥락과 일관성, 그리고 우리의 온갖 관념 등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 결국 에리얼은 텍스트 안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에리얼이 흑인일 수 없다는 반대론자들은 안데르센의 원작을 들이댄다. 분명히도, 안데르센의 소설(1837)에서 에리얼은 백인으로 묘사된다. 그러하기에 에리얼은 백인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혹은, 이러한 식의 주장은 198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의 에리얼이 백인이라는 점을 근거로 든다. 하지만 원작을 충실히 묘사해야만 한다는 주장의 허점에는 (1) 그럴 수 없고, (2) 그럴 필요도 없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1) 허구적 존재자의 속성은 미결정적이다. 에리얼의 호흡기관은 포유류의 방식을 따르는가? 아니면 어패류의 방식을 따르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원작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리얼 캐스팅 문제에 있어서 흑인이냐 백인이냐를 떠나, 아예 인간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에리얼이 어떻게 호흡하는지 조차도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2) 원작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적 의미가 있을 수도 있으나,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각색의 맥락’에서, 원작의 몇몇 구절을 그대로 따라 구현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가이 리치 감독의 <셜록 홈즈>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하는 셜록 홈즈는 셜록 홈즈가 아니다. 코난 도일은 분명히 그를 대머리에 매부리코로 묘사하고 있는데, 가이 리치 감독이 그려내는 셜록 홈즈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영화에서의 ‘셜록 홈즈’를 코난 도일의 원작에 나타나는 ‘셜록 홈즈’와 같진 않더라도 동일선 상에 올려놓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두 셜록 홈즈는 분명히 다른데도, 여기에 우리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다만, 새롭게 창조 및 해석된 것이라고 칭찬한다.
 
 

5.     에리얼의 본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셜록 홈즈>라는 또 다른 영화가 있다고 해보자. 이 영화 속의 주인공은 코난 도일이 묘사한 것과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생김새뿐이다. 그는 사소한 단서도 놓치며, 어떠한 쉬운 사건도 해결할 수 없는 무능한 탐정이다. 그렇다면 관객은 “저게 무슨 셜록 홈즈야?”라고 분통을 터뜨리며 환불을 요청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화에는 셜록 홈즈의 본질이 구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의 본질적 속성은 ‘작은 단서에 주목하여 합리적인 방식의 추리를 통해 남들이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전혀 구현되어 있지 않으면, 셜록 홈즈가 아닌 그냥 비슷하게 생긴 캐릭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 속성은 사소하지 않다. 반대로, 그 밖의 다른 속성은 사소할 수 있다. 따라서 셜록 홈즈는 대머리가 아닐 수 있으며, 매부리코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나는 이번 영화 <인어공주>를 보지 않았으나, 창조성이 바닥을 치고 있는 최근 디즈니의 추세를 미루어 볼 때, 높은 확률로 할리 베일리가 연기하는 에리얼은 에리얼의 본질적 역할을 구현하고 있을 것이다. 바다의 왕 트라이튼의 막내딸로 태어나, 인간 세계를 동경하며, 운명적 사랑을 꿈꾸는… 등등. 이 정도는 (아마) 충분히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에리얼은 흑인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밖의 속성, 즉 인종은 사소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제임스 본드가 여성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헤르미온느가 흑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여성 제임스 본드가 총을 쏘지 못하고, 흑인 헤르미온느가 슬리데린 소속의 열등생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더 큰 문제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아이유가 <범죄도시>의 마석도 형사역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가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예술에서 각색의 문제는 얼마나 원작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흥미로운 변주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6.     비판 (3): 에리얼은 이뻐야만 하는가?
 사실 이 논쟁은 에리얼이 흑인이라서가 아니라, 할리 베일리라는 한 배우 때문에 벌어진 것에 더 가깝다. 영화 <토르>에서 헤임달을 흑인이 연기했지만 여기에 별 다른 비판은 없었다. ‘화이트 워싱’이라는 비판이 있긴 했으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에이션트 원을 연기한 틸다 스윈튼은 지금처럼 욕을 먹지 않았다. 왜일까?


 적잖은 반대론자가 비판하는 지점은 에리얼을 연기한 할리 베일리의 외모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에리얼은 예쁜데 할리 베일리는 못생겼으니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박한 외모지상주의라는 비판을 수용하기 이전에 분명하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에리얼은 정말로 예쁜가? 아니, 예뻐야만 하는가?


 ‘아름다움’이 하는 역할, 그러니까 남자들을 한눈에 반하게 하는 능력이 <인어공주>라는 이야기에 얼마나 결정적인지는 불분명하다. 이야기의 비극은 에릭 왕자가 에리얼에게 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전부터 에리얼이 인간 세계를 동경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충분히 전형적인 미녀가 아닌 에리얼을 상상할 수 있고, 또 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할리 베일리의 외모를 지적하는 이러한 비판은 이 논쟁에서 그리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한다.
 
 

7.     비판 (4): 꼭 흑인이어야만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좋은 영화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 주장에 따르면 흑인이고 예쁘지 않은 에리얼은 허용 가능하다. 하지만 이때의 변주/각색은 왜 그래야만 하는지 하는 당위적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원작의 소재/이야기만 빌려 졸작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며, 따라서 이 경우 ‘원작 파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는 결코 좋은 영화가 아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설정들을 건드렸지만 “왜?”라는 의문에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레아 공주는 공중부양 할 수 있는가? 왜 루크는 옹졸한 늙은이가 되었는가? 등등. 한 캐릭터의 생명은 그/그녀가 속해있는 허구적 세계와의 일관성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개연성’이 요구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톰 홀랜드가 주연으로 열연한 <스파이더맨>에서 MJ는 흑인이며 그리 전형적인 미녀가 아닌 배우, 젠데이아가 연기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연기한 MJ가 매우 좋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록 원작의 MJ와는 아주 매우 다르지만, 그녀는 그녀만의 MJ를 독창적으로 창조해 연기했기 때문이다. 어딘가 음침하고 시크한 MJ는 전형적인 찐따인 피터와 꽤 잘 어울린다 (초미녀 MJ가 피터를 좋아한다는 설정이 오히려 더 개연성 없다!). 또한, 이러한 그녀의 캐릭터는 피터가 다니는 학교에서 꼭 한 두 명씩 있을 법하다. 즉, 젠데이아가 연기한 MJ는 피터가 속한 허구적 세계와 일관된다.


 가이 리치 감독의 <셜록 홈즈>도 마찬가지다. 코난 도일의 원작과 달리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그가 보유한 ‘토니 스타크’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여 새로운 셜록 홈즈를 창조해 냈다. 그래서 무뚝뚝하지 않고, 여성에 관심 없지 않은 셜록 홈즈가 설득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셜록 홈즈는 가이 리치 특유의 ‘리듬감 있는 액션’과 ‘타격감 있는 음악’과 아주 잘 어울린다. 마찬가지로, 이때의 셜록 홈즈는 허구적 세계와 일관된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에리얼은 어떠한가? 우선 중요한 질문, 왜 흑인이어야 하는가? 여기에 영화가 보여준 노력은 고작 에리얼의 가족을 다인종 집단으로 만들어 버린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영화는 트라이튼을 오대양을 누비며 여자나 밝히는 호색한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허구적 세계는 단 한 단어로 요약가능하다. “굳이?”


 만약 정말로 에리얼을 흑인으로 묘사하고 싶었다면, 허구적 세계와의 일관성을 위해 영화 무대는 덴마크 해안이나 카리브 해안 따위가 아닌, 아주 과감하게 아프리카 해안으로 바꾸었어야 했다. 물론, 그렇다면 에릭 왕자는 아프리카 어느 왕국의 흑인 왕자 혹은 백인 설정 유지를 원한다면 어느 백인 노예상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8.     비판 (5): 디즈니를 향한 인신공격의 오류
 흑인 헤임달이나 쿨한 셜록 홈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캐스팅 논란을 불식시킬 유일한 방법은 영화를 잘 만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디즈니는 흑인 에리얼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불쌍한 영혼”이라며 비아냥거렸고, 오히려 영화 외적 메시지를 웅얼거리며 논란 자체를 일축시켰다. 전형적인 인신공격의 오류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영화를 잘 만들고, 배우가 정말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다면 논란은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영화에 특정 정치적 입장이 담긴 메시지를 넣는다는 것 자체가 나는 그리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영화 자체가 특정 미학적 목적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프로파간다이니 말이다. 하지만 냉철하게 비판해야 하는 점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말 올바른지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갔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그냥 영화를 잘 만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마블 영화 개봉작들만 봐도 그렇고, 최근 디즈니는 과거와 달리 좋은 영화/애니메이션을 창조해 낼 능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논란도 결국 디즈니의 역량 부족 탓이 다름 아니다. 


 잠깐, 뭐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디즈니를 향한 나의 인식공격의 오류다. 뭐 어쩔? 

작가의 이전글 <파멜라, 러브 스토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