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
하나 개인적인 부끄러운 이야기. 어릴 때 화장실에 샴푸 하나가 있었다. 나에겐 중요한 샴푸였다. 샴푸통 겉면에는 금발의 육감적인 여자가 그려져 있었는데,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나는 밤마다 그 이름모를 그녀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잠을 청했기 때문이다. 내 첫사랑은 샴푸통의 그녀였다는 것은 나의 오랜 술자리 농담이었다.
하나의 인격체가 고작 샴푸통의 포장지로 전락한다는 것은 매우 비극적이다. 분명히 나의 그녀도 이름과 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성적 매력이 충만하다는 이유로 알지도 못하는 어느 초등학생 한 명에서 ‘나의 그녀’이니 ‘첫사랑’이니 하는 농짓거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퍽이나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상품은 말이 없다. 그래서 모든 상품은 도구적 가치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 샴푸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샴푸통을 땅에 내던진다 해도 샴푸는 결코 우리를 고소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비극은 어느 논리적 비약에서 발생한다. 그녀의 가슴이, 그의 복근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이 그녀 또는 그가 저러저러하다는 경솔한 판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파멜라 앤더슨은 대단히 잘 팔리는 상품이었다. 아마 마릴린 먼로 이후로 가장 유명한 금발의 글래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품성이 인간성과 동치이지도,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파멜라의 가슴이 멋지다고 해서 우리는 그녀를 함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이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녀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너무 빛나는 상품이기에 그녀의 매력은 우리의, 특히 남자들의 상식을 마비시킨다.
다큐멘터리 <파멜라, 러브 스토리>는 화장기 없는 그녀의 이야기, 어쩌면 그 누구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녀의 속마음을 공개한다. 미디어에 드러나는 모습과 달리, 파멜라는 내향적이고 수줍음이 많다. 쿨한척 하고자 하나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듯 하다. 이제 누가 내 가슴을 보려고 하겠냐는 그녀의 농담은 씁쓸하기만 하다. 그녀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산다. 찬란했던 젊은 시절의 영광과 지난 날의 상처가 여전히 그녀를 기쁘고 슬프게 한다. 그리고 그녀는 늙었다. 하지만 그만큼 현명해졌다.
섹스 테이프의 유출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힌다. 여기에 우리, 특히 파멜라를 상품으로만 보았던 고객들은 적잖은 당혹감을 느낀다. “아니, 저런 여자가 이런 일로 지금까지 괴로워 한다고?” 다큐멘터리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파멜라 앤더슨은 ‘저런 여자’도 아니고, ‘이런 일’을 당해서도 안되는, 그런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한 것이다. 제발!
파파라치와 고객은 동일한 관음적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 상품의 도구적 가치에만 주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떻게 팔아먹을지, 또 어떻게 항유할지만 고민한다. “파멜라는 어릴 때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녀는 플레이보이 모델로 우뚝 섰다. 그리고 그녀의 섹스 테이프는 대중에게 유출되었다. 의외로 그녀는 괴로워한다.” 논리구조를 유지한 상태에서 단어만 바꾸어 보자. “파멜라는 어릴 때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녀는 플레이보이 모델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녀의 섹스 테이프는 대중에게 유출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괴로워한다.” 잔인함은 고작 몇 단어로 나타나는 우리의 사소한 태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몰락의 서사를 그리지 않는다. 부당하게도 파멜라의 커리어는 상당부분 좌절되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동물보호와 채식주의 등의 여러 방면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최근에 결혼도 하고 이혼도 했다. 여전히 파멜라는 살아있고, 또 삶을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뮤지컬 <시카고>의 록시 역을 제안받았다. 기뻐서 날뛰는 그녀를 우리가 응원하는 것은 매우 지극히도 자연스럽다. 더 이상 상품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파멜라 앤더슨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LA로 가는 길에 그녀는 이번엔 남자를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명랑하게 말한다. 다행히 공연은 호평으로 끝났다. 이렇게 그녀는 그녀 자신과 결혼을 하는 것으로 구원의 서사는 완성된다. 부디, 이번에는 이혼하지 말고 그녀가 행복하길. 그리고 테이프를 유출한 이름모를 누군가는 평생 불행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