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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Aug 14. 2022

<가족의 탄생>

가족의 선험성 탐구

태어날 때부터, 혹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의 의미 파악은 간단치 않다.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건강한 신체의 소중함을 모른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돈의 절박함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이처럼 선험적(a priori, 경험 이전의)으로 주어지는 것들은 관습화 된 의식에 갇혀 그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어딘가 아파야 혹은 크게 파산해봐야 비로소 건강과 돈의 중요성을 알 뿐이다. 즉, 선험적인 것들의 의미는 후험적(a posteriori, 경험 이후의)으로 드러난다.


가족은 선험적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가족으로 관계 지워진다. 영화에서 가족의 존재는 자연스레 암시된다. 가령 밥 먹으라고 소리치는 엄마의 고성에 눈을 뜨는 주인공이 거실로 나아가니 아빠가 밥상 앞에서 신물을 펼쳐 들고 헛기침을 하는 장면, 이러한 전형적인 장면에서 그 주인공은 분명 누군가의 가족임이 확실시된다.


가족의 의미를 제시하기 위한 많은 영화적 시도들이 있었다. 영화적 사건을 통해 후험적으로 드러내게 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홀로코스트라는 잔인한 설정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표현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혈연관계라는 가족의 원초적 개념을 뒤집는 방식으로 가족의 본래적 의미가 탐구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러한 가족 영화는 가족의 의미를 밝히기 이전에 가족의 존재를 앞서 상정한다. 이례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가족 해체', 그러니까 '가족 부재'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간파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가족의 존재가 영화적 사건에서 앞서있다는 점에서 가족의 선험성은 그냥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연은 관계의 본질이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이러한 의미에서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은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 영화로서 이 영화는 역시나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이 영화의 탐구 방식은 가족의 '이미 주어짐'을 분석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주어진 것들의 의미 파악은 쉽지 않다. 영화에서 가족은 이미 존재하는 형식이기에 그 선험성은 늘 영화적 손길에 벗어난다. 하지만 <가족의 탄생>은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다. 어떻게 가족이 이미 주어지는가에 대답하기 위해 영화는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세 이야기를 제시한다.


우선 처음의 두 이야기를 살펴보자.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에서 형철(엄태웅)이 누나 미라(문소리) 앞으로 무신(고두심)을 데려오고, 어린 경석(김희수)을 남기고 엄마(김혜옥)가 죽는 영화적 사건은 가족 탄생을 알리는 신호에 해당한다. 두 이야기의 핵심은 우연성이다. 갑자기 형철은 누나 집에 무신을 데려오고, 갑자기 선경(공효진)은 엄마의 죽음을 겪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누군가가, 심지어 끈적한 혈연관계도 아니었던 그 누군가가 나에게 갑작스레 다가온다. 그리고 이후에는? 처음의 두 이야기에서 이 영화는 말을 아낀다. 왜냐하면 관계가 형성된 이후부터는 다시 가족이라는 틀 안으로 관습화 된 의식, 그러니까 가족 선험성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두 이야기가 서로 독립적인 구성을 가지며, 또 각각은 돌발적인 사건을 기술한다는 의미에서 가족의 탄생은 우연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족이 이미 주어진다는 선험성의 의미는 ‘우연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문소리는 얼굴 아래 감정의 심연을 담아내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제 이 영화의 세 번째 이야기를 이해해보자. 이야기는 시종일관 젊은 두 연인인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에 집중한다. 이 둘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서로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상호 간의 화학적 결합을 위한 촉매제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약간 의외의 전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족이라는 결합과 남녀 간의 결합은 조금 별개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족의 탄생이라는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국 사랑 없이 가족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하다. 가족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로 모이는 것인데, 이때 이 구심점, 그러니까 사랑과 같은 감정의 촉매제 없이 가족 개념은 형성되기 어렵다. 결국 이 영화나 다른 가족 영화들은 매우 단순하다. 거의 모든 가족 영화는 “사랑 없이 가족도 없다”로 요약된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는 사랑이 본유하고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기능을 한 번쯤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젊은 두 남녀의 이야기는 결국 가족 선험성 탐구를 위한 맥거핀이다.


미라가 대문을 여는 그 장면에서 앞의 두 이야기는 하나로 수렴된다. 이 영화적 순간은 매우 뜻밖의 전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 번째 이야기는 앞의 두 이야기에서 제시된 우연성의 역할을 반복한다. 하지만 세 번째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 이후와 앞부분에 위치한다. 다 큰 경석은 누나에게 빨리 결혼하라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선경은 동생 경석에게 묵묵히 샤부샤부를 챙겨줄 뿐이다. 이전에 주변인들을 밀어내기에 익숙한 그녀가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매우 놀랍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던 미라와 무신은 이제 서로 정겨운 티키타카를 치는 사이가 되었다. 채현은 이 둘을 모두 ‘엄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조금도 어색한 느낌은 없다. 왜냐하면 이제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연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단점: 형편없는 포스터


우연한 시작이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비약은 사랑이라는 촉매를 고려하여도 어딘가 설명되지 않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것이 더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는 식의 부연은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영화에서 제시된 것처럼 너무나도 다양한 양상의 가족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가족의 사례를 분석하는 순간 다른 사례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는 영리하게도 모종의 빈칸을 남기는 것이다. 따라서 빈칸은 무지에 대한 고백인 동시에 최선의 대답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 빈칸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은 우연에서 시작해서 필연으로 끝맺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족의 선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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