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와 욕망의 역학 관계에 대하여.
주체는 하나의 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작은 점을 너무 확대해서 이해한 나머지, 점이 아닌 하나의 면 혹은 특정한 실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도 문장의 주어 자리에 위치하는 ‘나’라는 그 주체는 다시 한번 인식의 뒤편으로 숨어버린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실체로서의 주체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체는 차원을 갖지 않는 아주 작은 점이다. 이 작은 점은 인식의 풍경에서 소실점 역할을 한다. 눈앞의 50 cm는 정말로 50 cm로 보이나, 내가 뒷걸음질 칠수록 50 cm는 1 cm로,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나의 점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인식의 풍경은 주체라는 한 점을 중심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객관적 인식은 늘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인식의 난이도만 두고 보자면 섹스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섹스를 “섹스”라고 말하는 순간 상당히 혼란스럽고도, 남사스럽고, 한편으로는 장난을 치는 듯한, 어떤 언어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묘한 감정을 숨기고자 우리의 언어는 재밌기까지 하다. “섹스”, “그것”, “성관계”, “떡”, “잠자리”, “사람을 나누다”. 한편으로는 “사실 그게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성기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솟구치는 그 욕망 때문에 엘리스(니콜 키드먼)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는 생각조차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섹스와 성욕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의미에 베일을 계속해서 씌우려는 욕망하는 주체, 즉 강력한 힘으로 본래적 의미를 왜곡시키는 그 작은 한 점을 없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한번 눈을 찔끔 감을 필요가 있다 (eyes wide shut).
스텐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은 욕망, 그중에서 성욕을 다룬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특징은 몇몇 싸구려 영화(가령,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달리 ‘에로틱함’을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섹스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가령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난교파티 장면이 그 어떤 성적 긴장감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차라리 기이함 혹은 두려움의 감정을 이끌어 낸다는 점이 그러하다. 감독/영화의 일차적 의도는 명확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섹스는 섹스일 뿐이라는 객관적 인식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눈을 감으면 산과 물이 그대로 보이는 것처럼, 성기를 중심으로 한 욕망의 주체를 거세를 하면 섹스가 고스란히 보일 것이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거세된 시각을 지양한다. 그러하기에 모든 성애 장면은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거세된 시각은 빌 하포드(톰 크루즈)라는 인물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빌은 뉴욕에서 상류층에 속하는 의사로, 모든 것이 그에게는 사무적일 따름이다. 아내를 보지도 않고 완벽하다고 칭찬하며, 담당 환자의 성적 일탈을 보고도 별 다른 감정의 미동 없이 그냥 넘어간다. 그냥 그는 남편으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사명만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 그 역을 맡은 배우가 그러한 것처럼, 영화에서도 빌은 매우 매력적인 남자다. 그에게는 많은 유혹이 있다. 여자 모델 2명이 그를 유혹하고, 심지어 몇 번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은 담당 환자의 딸이 그에게 고백한다. 또한, 직업으로 인해 여러 여자의 젖가슴을 만진다. 하지만 빌은 이들과 섹스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러한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인간의 심연에는 저마다의 괴물이 있다고들 하는데, 빌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빌은 거세된 욕망의 소유자로 보이는데, 사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세상 가운데 바람직스럽게 여겨지는 하나의 이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에 시비를 걸면서 시작한다.
거울 속에 비친 아내 엘리스의 표정은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그리고 이는 영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엘리스의 표상으로, 사실 빌과 대조되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그녀가 헝가리 신사와 춤을 추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상당한 성적 긴장감은 어쩌면 그녀가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 하고자 하나, 잘생긴 해군 장교와의 하룻밤이 얼마나 강렬하고 무서운지를 알고 있다. 문제는 욕망의 파도가 그녀를 넘어 빌에게 덮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엘리스의 성적 욕망에 빌은 충격을 받는다. 그녀의 고백은 마치 “성욕이 무엇인지 가서 배우고 오라!”라는 명령 혹은 당위로 보이는데, 공교롭게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빌은 그 길로 여정을 떠난다.
보통의 여정 이야기에는 복수심이나 호기심과도 같은 모험가를 사로잡는 감정이 있다. 빌에게는 당혹스러움이다. 어떤 것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기존의 인식 구조와 작동에서 예측되지 않은 것이 나타날 때 발생하는 인식의 오작동 같은 것이다. 엘리스를 사랑하는 빌의 인식 구조에선 그녀가 다른 남자와 섹스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엘리스의 고백은 일종의 위반이며, 빌의 인식을 어지럽힌다. 영화 내내 빌을 지배하는 상상은 엘리스가 그 해군 장교와 섹스에 탐닉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표상은 결코 현실 가운데 일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빌의 실제 인식과 행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즉, 아내가 외도하는 빌의 상상은 상상 그 자체일 뿐이지만 현실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빌의 여정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그것은 당혹스러움이다.
빌의 여정 속에서 그의 상상은 이내 현실, 그러니까 주변 가운데 관찰 가능한 대상 혹은 상황들로 변한다. 별로 잘 알지 못하는 여자가 약혼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빌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순수하나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어린 여자가 늙은 두 남자와 음란한 짓을 한다. 이러한 장면들이 매우 기이해 보이는 까닭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라서가 아니라, 빌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매우 정상적으로 보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빌에게 고백하는 그 여자는 자신이 맨 정신이며 진심이라고 하나, 사회적 통념상에서 그 여자는 어딘가 이상하다. 마찬가지로 어린 백인 여자는 그냥 철딱서니 없는 소녀이지만 동시에 음탕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빌은 길가를 서성이다가 매춘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때 빌의 말은 매우 흥미롭다. 그 여자가 한 마디를 말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질문으로 되돌린다. 뭔가 붕 떠있는, 그러니까 빌의 자아와 육체 사이에 일종의 균열이 생긴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위반의 상황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기에 그는 섹스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후 빌은 비밀스러운 대저택으로 이동한다. 충격적인 난교파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빌은 여기서도 탐닉하지 못한다. 가면과 망토는 탐닉을 위한 자격조건이지만 빌에게는 단순한 변장 장치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그는 이내 곧 정체가 탄로 나고 만다.
지젝이 지적했듯이(출처: <The pervert’s guide to cinema>, 2006) 이 대저택 신에서 충격적인 난교 장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음산한 느낌을 주는 청각적 자극이다. 바로크식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음악은 어째서인지 내면을 울리며 마음 깊숙이 들어서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 개인차가 있겠지만, 아마 큐브릭의 의도는 영혼의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음악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각적 풍경은 인간의 상상을 제한하지만 청각적 자극은 상상을 무제한적으로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대저택 장면은 ‘정상적으로 보이는 비정상적인 인간의 욕망’을 어떠한 욕망 없이, 그러니까 인식의 소실점 없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피카소의 입체파 화풍과도 같다. 그의 그림이 그러하듯이 대저택 장면도 기괴하게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저택 신에서 시각적으로 중요한 점은 참여자 전원이 가면을 쓴다는 것이다. 가면은 욕망의 날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일종의 안정장치, 그러니까 사회적, 도덕적 장치와도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잘 다루어진 것처럼, 욕망에 대한 흥미로운 교훈은 제약 없이 위반도 없다는 것이다. 즉, 가면을 써야만 우리는 난교파티를 즐기는 저들처럼 안전하고 부끄러움 없이 알몸으로 섹스할 수 있다. 동시에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욕망의 탐닉을 즐길 수 없는 상태에서 더 나아가 그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에는 언제나 위험이 뒤따른다. 임신, 비만, 나태 등). 이는 정체가 탈로나 강제로 가면이 벗겨지는 빌이 처하는 위험에서 잘 드러난다. 대저택 장면 이후에 빌에게 가해지는 은밀한 협박은 표면적으로는 욕망, 특히 금지된 섹스에 대한 경고이겠지만 심층적으로는 욕망 자체에 대한 무지의 고백에 가깝다. 관객이 대저택에서 이루어지는 밀교 집단과 의식(난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의미를 왜곡시키는 인식 주체를 달고 다니는 우리 인간은 성적 욕망을 포함한 그 어떤 욕망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섹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것을 직시하려고 하는 순간 ‘섹스’의 의미는 주체라는 한 점을 중심으로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블랙홀이 주변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것처럼.
대저택에서 쫓겨난 이후 집으로 돌아온 빌은 가면과 망토를 반납한다. 기이한 전날 밤을 겪은 빌에게 다음날 낮은 이전과는 다른 일상이다. 전날 밤에 음탕한 짓을 하다가 걸려 혼이 나던 어린 소녀와 두 중년 남성은 이제 낮이 되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한다. 어쩌면 빌과 섹스를 할 뻔했던 매춘 여성은 에이즈 판정을 받았다. 또한, 대마에 취해 해군 장교와의 섹스를 상상했다고 고백한 앨리스는 다시 충실한 아내이자 엄마로 돌아왔다. 사실 이 영화 전체가 그러하지만 특히나 영화 후반부는 상당한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빌에게 암호를 알려준 피아니스트 닉(토드 필드)은 이후에 해코지를 당했을까? 빌이 구해준 그때 그 약물에 취한 여성은 난교 파티에서 어떻게 가면을 쓴 빌을 알아보았으며, 또 빌을 구하려다가 정말로 목숨을 잃은 것일까? 전날 밤의 그 난교 파티는 욕망의 심연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감독은 차라리 수수께끼로 남겨두는데, 욕망에 관해서 우리 인식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빌이 전날 밤에 경험한 것처럼 인식의 한계를 넘어 어떤 초월자적인 위치로서 욕망을 직시하는 행위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일상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일상의 보존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약 빌이 전날 밤에 매춘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더라면, 만약 앨리스가 그때 그 해군 장교와 섹스를 했었더라면 이들의 일상은 큰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일상을 보존할 수 있었다. 결국 금지된 섹스는 하나의 상상으로만 남겨두고 남몰래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아니면, 앨리스의 고백처럼 사회적으로 용인된 관계 내에서 질펀하게 떡(fuck)을 치는 것이 우리들의 성적 환상에 곁눈질을 주며 즐기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인간은 완전히 만족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러하기에 우리의 일상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