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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휴업 Dec 15. 2023

2023/12/15

글 찌꺼기 모음

  #0, 자기 검열 없이. 퇴고조차 안 된.


  #1, 찌꺼기.

  글이라는 건 결국 기억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파편이고 허구이다. 이런 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수십 년을 살아온 나의 과거가 조금(혹은 엄청나게) 미화되거나 폄훼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친구 녀석은 내 글이 가진 진실의 농도에는 크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깐 글이라는 건 결국 도취적일 수밖에 없 아닐까?"


  #2, 다른 찌꺼기.

  술주정이랑 섹스 자랑이 귀여운 건 이십 대까지야. 서른이 지나면 약간 추하고 마흔이 되면 듣기만 해도 인상이 써지지.


  #3, 또 다른 찌꺼기.

  오래 머무는 것들은 자꾸만 사라져 가고 우리의 눈길을 순간적으로 훔쳐가는 것만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대.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는 사라진다. 팔로워와 라이크는 늘어나지만 타자와 만나지 못하는 세상 속. 존속과 지속이 사라지는 삶에서 모든 것들은 찰나로 소비되어 간다. 예술은 컨셉화 되어가고 작업은 곧 디지털로 치환되어 있다. 예술의 작업장은 사라지고 아이디어만 남은 세상에서 글쓰기라는 노동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는 무엇일까. 다행이랄까. 글쓰기는 그 본질이 아직은 노동에 맞닿아 ㅇㅆ따. 지난 백 년의 기술 발전에서 블라블라블라~


  #4, 이것도 찌꺼기.

  "외로워?"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젊은 여자가 날 끌어 앉으며 물었다.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진 것인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의미야?"

  "그냥, 눈이 좀 그래 보여. 깊어서 그런가?"

  그녀가 나의 머리를 품에 안고 말했다.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말이었다. 남자를 꼬시는 그녀만의 비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워 보인다는 말 한마디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니야. 그냥 내 눈이 좀 그래 보여."

  "그런가? 근데 눈 말고도 다 그래. 네가 쓴 글, 찍은 사진, 네가 좋아하는 것들 전부 다 그래 보여."

  그녀가 말했다.

  

  #5, 여기도 찌꺼기.

  그러니깐 그 레몬살롱이라는 건 어느 놀기 좋아하는 있는 집안의 자제분이 2000년대 초반 어느 홍대 거리 한 구석에 세운 작은 펍이었다. 지금이야 제비다방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달고서 운영되는 건실한 '복합문화공간'이지만, 당시의 정체성이라는 건 사실상 오고 가는 뜨내기들에게 술이나 좀 팔면서 우리끼리 놀자는 식의 '놀이터'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 모이는 이들은 대게 낮이면 숙취에 시달리면서 지난밤에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에 대해 자랑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고, 밤이면 누군가 데려온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어깨를 기대고 저 밖의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은 아직 먹어보지 못했을 수입산 맥주의 이름 따위를 줄줄이 외워대며 예술에 대해 떠들어 대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걔 중에는 크라잉넛 같은 걸출한 아웃풋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대게는 그들 옆에 앉아 인맥을 호소하면서 같은 부류로 보이고자 발버둥 치는 어쭙잖은 예술호소인이 모여 술이나 퍼마시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예술호소인이라는 것들이 대게 그러하듯이 걔들은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딘지 모를 열등감을 갖고 있었는데, 보통은 쥐뿔도 없는 재능으로 최대한 있어 보이려 허덕이는 예술대학생일수록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들은 어디선가 새로 나타나 옆에 자리를 잡은 비예술대생들을 향해 '쟤는 뭔데 여기 있어?'같은 불편한 심기를 애써 숨지기 않고 드러내고는 했으니 말이다.

  "레몬살롱 다닐 때 알았던 친구라서 다녀왔어."

  오랜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온 친구의 말이었다. 뭐 크라잉넛을 오빠들이라고 표현하는 친구이니 오죽하겠는가. 자신이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술을 마셨던 사이였고, 레몬살롱의 원년멤버였다는 것을 일생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친구였다. 20년 전 어떻게 놀고먹고 마시고 놀았는지가 자신의 삶평가하게 이라면 (마


  #6, 저기도 찌꺼기

  그러나 식문화 운동을 마르크스주의 운동으로 혼동하지는 말자. 재래종 토마토에 열광하고 니먼렌치 농장에서 풀을 먹여 기른 소의 고기를 드라이에이징했다고 열광하는 태도가 과시적 소비와 전혀 무관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부유한 사람들은 항상 음식을 통해 자신을 나머지 사람들과 구분 지어 왔다. 히피들이 여피가 되자 가처분 소득을 음식에 쏟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고급 주방용품 편집숍 윌리엄스 소노마가 성장하고 수많은 미식유튜브 채널이 등장했으며, 미식포르노라는 트렌드가 생겨났다.


  #7, 참 많은 찌꺼기.

  "내가 더러워? 내가 더러운데 그래서 뭐? 난 이게 너무 좋아. 내가 누군가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해.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어. 이 일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발새끼들. 너희들이 뭘 안다고 그래? 그래 나한테 매달려서 울어댄 남자들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 밖에서는 강한 척하는 새끼들도 다 나한테 안겨서. 응? 너 나 할 거 없었어. 다들 순한 아이 마냥 내 품에서 눈을 감았지. 지랄 맞은 새끼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마저 좋았어. 어디 가서는 욕한 마디 제대로 못 하는 병신들이라는 걸 알았거든. 그 지랄 맞았던 행동들도 결국 내 앞에서 지들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니깐."

  그녀가 울분을 토하듯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난 최소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뭔지는 알아. 근데 대체 니들은 뭔데?"


  #8, 마지막 찌꺼기.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때가 와야 했을 테니까요. 제가 섭섭한 건 이게 그냥 평범한 일이 될 거라는 거예요. 모든 손자 손녀들이 언젠가는 할아버지를 잃을 테니. 하지만 제가 할아버지의 손자고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였던 순간은 저마저 죽고 수억 년이 지나도 다시 오지 않아요.


  #9, 어떤 출력이 필요 없는 삶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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