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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Oct 22. 2023

남편이 망했다

(분량상의 이유로 중간 부분 생략)


내 나이 마흔 여섯

남편이 망했다.

항상 쪼들리고 궁핍해도 남들보다 저축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그럴싸한 말로 집안 상황을 포장해대던 남편으로부터 망했다는 사실을 통보 받던 날 아침.

우린 공교롭게도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하는 의례적인 검진이지만 이 걸 받으면 회사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다. 내 돈 내고도 해야 하는 일을 돈까지 벌면서 하는 거다. 그런데 이것도 일이라고 예약을 잡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이 날도 억지스레 연례행사를 하기 위해 병원에 들린 것이었다. 검진을 받는 동안 의사선생님은 의무적이면서 사무적인 느낌을 풍기며 나에게 물었다. 

“우울증은 없으시죠?” 

꼭 우울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게 검진을 하는 동안에도 의사선생님은 “아, 맞다! 우울증은 없으시죠?” 

두어 번을 더 물어 봤다. 그때마다 나는 뭐 이런 걸 쓸 데 없이 반복적으로 묻냐는 식으로 나는 씩씩하게 

“네, 없어요.”

라고 대답했다. 물론 내 뒤로 검진을 받은 남편도 그러했으리라. 우울증 같은 건 없다고... 


검진이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있던 마트를 보며 남편은 나에게 

“저기 지점에서 사람 구하던데.. 한 번 가봐.” 

불쑥 말을 내뱉었다. 무의식 속에 꽁꽁 싸놓았던 말이 의식이 봉인이라도 해제된 듯 마트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주술처럼 흘러나와버린 것이다. 

“우리, 그 정도로 힘들어?”

얼결에 튀어 나온 말을 남편은 

“아니다. 내가 투 잡을 뛰어야겠다.”는 

말로 주워 담았다.


아이들 친구들을 초대해 슬립오버(친구들과 집에서 하룻밤 자는 것)를 해주기 위해 나는 마트에 가서 장을 봐왔고 아이들 오기 전에 세팅을 마쳤다.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둘 집에 도착하자 뒷마당에서 햄버거를 만들 준비를 했다. 그리고 소고기 패티를 구웠다. 그렇게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밤을 새울 기세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끝내고 주방 식탁에 앉아 물을 한 잔 들이켰고 어쩐 일로 남편도 지하실 자기 방에서 혼자서 마시던 소주를 내가 앉은 식탁으로 가지고 나왔다. 침묵과 함께 한 두 잔 들이키더니 자기가 NFT(대체 불가능 토큰)과 연계된 Ape 코인에 투자를 했는데 돈 14억을 날렸다는 말을 꺼냈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나 싶었지만 이 상황이 나에게 진짜로 들이 닥쳤다는 것이 폐부로 와 닿았다. 여자의 직감은 참 무서운 것이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오래 전부터 파고들었고 나는 남편이 사둔 지루한 원숭이 NFT가 휴지조각이 되었을 것 정도는 짐작했다. 그러나 이 짐작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지 않고 눈앞에 풀이 죽어 있는 남편의 모습을 통해 실체가 되어 있었다.  


때마침 건강검진을 하고 왔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흥분을 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사지 멀쩡하고 먹고 살기만 하면 됐어. 가난은 별 거 아냐. 쓰러진 거 아니고, 직장도 멀쩡히 다니고 있고.. 그럼 된 거야.”

사실 이것은 팩트였다. 남편이 죽은 것보다 훨씬 나은 건 어쨌거나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그러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도 나왔다. 그리고 하루에도 열두 번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나는 감정 통제의 기능이 망가지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감정이 제멋대로 구는 기현상을 경험하게 됐다. 이것이 망했다는 것을 머리와 마음으로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아이들에게 경제적 파탄을 가져온 아빠보다도 더 최악인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산책을 나가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것이 심해지면 집에 들어와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축 늘어져 있었다. 날이 더해갈수록 증상은 심해졌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면 남편한테 달려가 어떻게 상의도 없이 대출을 해서 투자를 할 수 있냐고 울며불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말도 정상은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면 금융기관에 매달 상환해야할 금액이 200만원씩 늘어나 있었다. 첫 날 한꺼번에 사정을 오픈하지 않았던 탓에 날이 갈수록 더 절망이 되는 상황을 정확하게 알게 되는 데 걸린 시간이 보름이다. 1400만원. 한 달에 우리가 금융권으로 지불해야하는 금액이다. 그것도 생활비를 제외한 액수.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빚이 생기는 인생이 시작됐다.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끌어서 받은 집 담보 대출로도 부족해지자 남편은 무담보 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이마저도 더 이상은 대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에게 털어 놓은 것이다. 게 중에는 대출 이자가 20%인 것도 있었다. 투자 손실이 크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건 작년부터였다. 투자 상황에 대해 공유를 안 하는 남편이지만 그 결과는 몸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편의 잇몸은 이 주저앉았고 두어 차례의 수술로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밥을 먹는 도중에 앞니가 하나 둘 빠지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이것 저것 알아보더니 치아 전체를 임플란트로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한 달 간 치아 공사를 위해 한국에서 머물렀다. 그 때도 남편은 투자에 관해서는 나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하고도 반이 지나자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나는 괜찮았다. 모든 것을 잃고 다시 0에서부터, 아니 마이너스에서 시작을 해야 했지만 적어도 죽고 싶지는 않으니 말이다. 생계를 위해서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일을 해야 하는 건 기정사실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이왕이면 되도록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 더 나았다.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전문적인 일은 우체국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시간당 2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강사로서의 경력은 미국에 와 있는 시간만큼 단절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에서 일을 하는 게 훨씬 나은 타산이었다. 이제 막내 규리도 중학생이 됐고 아이들 모두 저희가 알아서 밥은 차려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 엄마가 없어도 충분히 생활이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집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가만히 넋 놓고 뒷짐만 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당장 한국으로 떠나기엔 해결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집을 팔아서 빚도 갚아야 했다. 공동 명의의 집이기 때문에 매매시 나의 서명이 필요했다. 또 집을 줄여 이사를 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남편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일단 이사 갈 집부터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새로 이사 갈 집도 온전히 빚을 내서 사야하는 집이지만 그마저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웬만하면 인터넷상으로 고급스럽게 보이는 사진조차 후져 보이는 집들을 보러 갈 수밖에 없었다. 가난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부동산 중개인의 안내에 따라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갔다. 침수가 되었던 흔적인지 지하에서부터 악취가 올라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집이 마음에 드냐고 묻는 중개인에게 영혼 없이 

“좋다.”고 

답을 했다. 적은 예산에 이보다 더 좋은 집을 바란다면 양심이 없다고 느껴졌던 탓일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되도록 긍정적 반응을 내비쳤다. 중개인은 이 집의 구조가 참 이상하다는 말과 함께 다른 집을 더 보겠냐고 물었다. 솔직히 첫 번째 집이 시원찮았던 우리는 중개인의 의견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두 번째 집으로 향했다. 첫 번째 집처럼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있는 집이었지만 집안에 베어있는 특유한 냄새는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처음보다 좋아보여 만족을 하고 있었는데 중개인은 우리에게 이 집은 이상하게도 다락방을 침실로 표시하고 그렇게 방의 수를 세어놓았는데, 만약 이 집을 사게 되면 나중에 팔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을 해줬다. 나중을 생각한다면 이집은 안 사는 게 좋겠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중개인과 같이 봤던 두 집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다음 집은 좀 더 나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마지막 집을 찾아 갔다. 그런데 이 집은 문을 열자마자 올라오는 냄새 때문에 집을 둘러보는 것도 힘이 들었다. 중개인 역시 우리한테 이 집은 자기도 양심상 팔고 싶지도 않다며 나중에 괜찮은 집 나오면 그때 같이 보자고 했다. 우린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물건을 하나라도 파는 게 돈이 되는 중개인이 난생 처음 보는 고객에게 자기가 보여준 집들은 안 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꺼낼 때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의 이익보다 우리를 더 크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동양인들이 그것도 아이가 셋이나 있는 한 가족이 세상 물정 모르고 해맑게 다닌다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중개인은 우리의 입장에서 결정을 도왔다. 이런 집들을 같이 보러 다니는 중에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던 아이들 앞에서 나는 참 많이 부끄러워졌다. 사춘기 또래의 아이들이 집이 망했다는 사실에 별 타격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에 나의 우울은 변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성숙하게 느껴졌다.


망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통보받은 탓에 볼만한 집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이사철이라는 것이 확연히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이후로는 비시즌이라 매매가 거의 없다. 그래서 집을 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집을 팔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집을 팔아야 집을 살 수 있는 돈이 생기기 때문에 적절한 타이밍도 중요했다. 그런데 우리는 집을 사고 팔 수 있는 시기를 이미 놓쳐버린 상태에서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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