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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Oct 19. 2023

병신 같이 쿨하지 못하게

날둥지를 찾아 헤매다 찢어진 날개가 아물때쯤 다시 너에게도 비상을 시도하는 나는 눈 먼 새. 길바닥에 파닥거리는 비둘기처럼 너에게 아무런 동정이 되지 않는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피를 뿜어대며 죽어가. 감은 두 눈으로 헛된 꿈을 꾸며 날개짓을 해보지만 결국 혈관은 물리적 힘을 받고 팽창과 함께 파열되고 그렇게 파국으로 향해 가는 나는 눈 먼 새.  


내가 괜찮다고 해온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예준이가 돌아오기를 바랐고 그가 돌아오지 정처 없이 날다 뭔가에 부딪혀 추락해 버리는 눈 먼 새처럼 비참했다. 그런 나에게 기적처럼 예준이가 와 준 것이다.   


예준이는 몇 날 며칠 우리집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래도 우리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예준이와 나는 마주서게 됐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내 심장은 중력을 거스른 채 내 신체의 일부로 고장되어 있지 않고 갑자기 만유인력의 영향을 받아 아래로 쿵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내 생각에서보다 야위고 못 생긴 그 애가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와 할 얘기가 있다고 그가 나한테로 한 발 더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나는 그 애에게

“나는 너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

하고 말을 아꼈다. 그러자 그 애는 

“너는 듣고만 있어도 돼. 내가 말할게.”

그렇게 나는 그 애를 따라 집 근처 커피점으로 갔다. 자리를 잡고 마주 앉은 그 애는 말을 하겠다고 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 애에게 따졌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준비도 안 된 나에게 이별을 통보할 수가 있었어? 너 원래 이렇게 나쁜 애였어?”

“…….”

그 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그 애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함축이었다. 그때 그 애가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면 나는 그 애에게 집중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나는 거기에 매료가 됐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그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들은 열 마디 말보다 값지고 세련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애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자기가 나한테 써온 글들을 보여줬다. 나는 첫 줄을 읽자마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 냈다. 병신 같이 쿨하지 못하게 도도할 수조차 없이 나는 내가 얼마나 그 애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걸스카웃 뒤뜰 야영에서 행사 진행을 받은 사회자가 종이컵으로 감싼 촛불을 1분간 응시하게 한 다음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어머님.... ”

이 한 줄의 문구를 읊으면 여기저기서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쏟아져 나오던 것처럼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똑같이 그랬다. 나는 그렇게 쉽게 그 애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행동과 말은 다르게 나왔다.

“집에 돌아가. 생각해보고 연락줄게.”

“나 집에 안 돌아갈래. 네가 다시 나를 만나준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어.”

“예준아, 그냥 돌아가.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이 정도는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며칠이면 돼.”

“나한테 돌아와 줘. 내가 진짜 잘 해줄게. 내가 너에게 연락이 닿을 수 없을 때 나 진짜 많이 깨달았어.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너였다는 거. 그리고 나와 가장 잘 맞는 사람은 너라는 거.”

“알았으니까 연락 기다리고 있어. 사실 나 지금 만나고 있는 오빠가 있어. 그래서 상황이 좀 복잡해. 여쨋든 우리가 다시 만나든 그렇지 않든 연락은 꼭 해줄게.”

이게 마지막 나의 자존심이었다. 나도 너 없이 잘 살고 있었고 나는 너 말고도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예준이를 만난 다음 날 나는 지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보나마나 예준이를 통해 건네받았을 게 뻔하다. 우유부단한 예준이는 내 번호를 달라는 지우를 단호하지 거절하지 못했을 테고..,. 나 또한 예준이로부터 지우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했던 적이 있다. 나는 예준이 없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으니 제발 헤어져 달라고 부탁을 하기 위해. 

“너는 다른 남자친구도 있고, 나만큼 예준이가 절실한 게 아니니 헤어질 수 있잖아.” 

애원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전화 건너편에 지우는 나에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예준이와 헤어져 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 오랫동안 만나고 있던 남자 친구가 있었어. 그런데 예준이가 다가와 사귀어 달라고 매달렸고. 그 때문에 멀쩡히 잘 사귀고 있는 남친과 헤어졌는데 이제와서 나를 버리고 너한데 돌아가는 건 도의적이지 않는 거잖아. 그리고 나는 예준이와 헤어질 수도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어. 나 정말 예준이랑 못 헤어져.”

일면식 없는 상대방의 절박함과 아픔보다 내 감정이 중요한 건 죄악처럼 느껴졌지만 예전 통화 때 지우도 나와 같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지 않았나. 그리고 예준이는 원래 내 남자 친구였다. 그런 예준이를 빼앗아 간건 지우였고 다시 모든 일이 본래대로 돌아온 것 뿐인데 잘못된 것이 없어 보였다. 

사실 예준이가 처음 나에게 왔었을 때도 이와 똑같았다. 전여친이었던 혜화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예준이와 헤어져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 둘다 한 남자를 좋아하지만 그 남자는 나를 택했는데 내가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여자들이 자신의 감정들 때문에 오버랩 되며 겹쳐지는 다른 여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걸게 만드는 예준이는 매번 이런 식으로 하나의 연애를 마무리했다. 자기 스스로가 교통정리를 할 수 없으니 여자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고 오라는 식인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패턴이었다. 이렇게 그를 분석하자면 나쁜 남자임에 분명한데 그렇게 단편적으로 결론을 내려버리기엔 예준이는 너무도 착했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배려를 다 해주는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여자들은 서로 예준이를 차지하겠다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전 사람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보라는 말은 예준이한테 딱 적용됐다. 그 모습이 바로 내가 이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될 모습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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