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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04. 2022

내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

창조주는 우리 생각보다 무능력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요

교회에 열심히 나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소모임은 물론이고, 각종 봉사활동에 여름과 겨울이면 황금같은 휴가를 일주일씩 써 가며 해외선교까지 나갔더랬죠. 사람들도 좋았고, 예배당에서 찬양과 기도를 드릴 때면 저 높은 곳에서 신이 한없이 따뜻한 손으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듯한 황홀한 기분에 가슴이 충만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다 일련의 사건을 겪게 되고, 그 결과 "신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개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말이지요.  신을 믿는 것이 유리하다고 한 파스칼과 같이 정교한 논증을 통한 결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물론 파스칼의 논증에도 헛점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단순히 나쁜 일을 겪어서 마음이 돌아선 것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아버지는 일반인이 상정하는 아빠, 즉 부모와 같거나 적어도 매우 유사한 개념입니다. 때문에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는 기도를 어려워하지 말고 부모님과 대화하듯이, 혹은 하소연하는 것처럼 해도 무방하다고 설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마음 있는 그대로 말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취지였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로 치환하는 경우 심각한 모순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고통과 불의로 가득 차 있는데, 우리는 전지전능한 아버지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통과 불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크기와 고통 및 불의의 정도는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으며, 때로는 가장 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커다란 고통과 불의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도대체 어떤 부모가 자식이 평생을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심지어 말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고통과 불의를 '성장을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예컨대 공부나 운동과 같이 자식이 싫어하더라도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싫은 일'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현세에서 겪는 고통과 불의는 우리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떠한 통과의례도 자식이 죽을 것 같다고 울고불고 애원하며 멈춰 달라고 하면, 부모로서는 일단 멈춰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중대한 수술과 같이 매우 고통스럽더라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설득이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너무 무지하여 하나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전지전능하시면 어떻게든 그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나요? 혹시 그 소통의 방법이, 제가 예배당에서 찬양과 기도를 드릴 때 느꼈던 그 충만함, 그것인가요?  그건 너무 일차원적인 것 같은데요.  혹시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을까요?  그렇지만, 어느 부모가 믿음이 부족하다고 소통을 단절하나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개과천선(born again)하여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을 준수해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이 계명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 제가 겪은 악인들 중 상당수는 개신교도였는데(혹자는 이들을 바리새인 - Pharasee - 에 비유하더군요), 아무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찬양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목놓아 울부짖어 보아도, 이들을 사랑하기는커녕 더욱 증오하게 되더군요.  오히려 악인을 사랑할 수 없는 속좁은 사람으로 빚어 놓았으면서도, 계속해서 불가능한 숙제를 강요하는 '하나님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떠한 아버지가 자식이 감당할 수 없는 숙제를 내 주나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뭐 이런 건가요?  내 이웃이 우리 가족을 해친 숙적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래도 사랑해야 하나요?  만약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사양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기도해야 한다' 였지요.  기도에 '응답'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면, 신앙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합디다.  아니, 저는 제 자식이 눈짓만 해도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달려가는데, 내 머리카락 숫자도 알고 미래의 생각까지 꿰뚫고 있는 부모가, 자식이 이렇게 간절히 말하는데도 대답해 주지 않을 수 있나요? 


결국 저는, 설령 창조론에서 말하는 신이 있다 하더라도, 개신교가 설파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 아버지'과 같은 존재는 아닐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마 신은 우리 생각보다 무능하거나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요. 먼지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인간들이 전지전능해 보이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먼지에 관심을 두거나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것처럼, 신도 우리 인간들의 안녕을 챙길 여력이나 의지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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