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림 Feb 03. 2024

모더니스트의 서울 나들이

【덕수궁국립현대미술관 - 가장 진지한 고백 : 장욱진 회고전】


햇살과 바람이 차게 느껴지는 주말 아침이다. 시간 맞춰 도착한 덕수궁엔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 중이었다. 전날 미리 예약했던 티켓을 찾아 입구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1세대 모더니스트였던 장욱진의 일생을 아우르는 전시라 기대 가득 설레는 발걸음이 가볍다.


전시관엔 모두 4개의 주제로 젊은 시절, 중장년, 진진묘, 마지막 남은 그림으로 테마를 정해 전시되었다. 첫 번째 주제로 삶이 저항으로 나 자신의 세계에 사는 것을 그렸다. 주로 어둡지만 간결한 필치와 다양한 소재, 시대상에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교과서에 보이는 '공기놀이', '자화상' 여러 점이 있다. 밝은 채색도 눈에 띄고 비교적 작은 화폭에 많은 그림을 그렸던 화가라 그런지 귀엽고 예쁜 그림도 많다.


이건희 특별전에서 봤던 '나룻배'를 이번엔 '소녀'로 전시하고 있다. '소녀'는 작가가 일본 유학 시 산지기 딸을 그린 것인데 전쟁통에 부산 피란 가면서 뒷면에 그린 그림이라 알려져 있다. '소녀' 뒷면의 '나룻배'는 앞뒤 한 패널 두 작품으로 이번엔 소녀의 실물을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작은 사이즈 그림이 많은 이유는 작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였다 한다. 평소 엎드려 그리기를 했다니 자유롭고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작가에게 특이한 습관이다. 그의 그림은 평안한 자세로  누워있는 남자 그림이 많은데 평소 작가 습관이 투영되었나 보다.


두 번째 고백에선 '까치', '나무', '해와 달'을 선정해 상징성과 의미를 보여준다. 같은 소재로 반복해 그렸지만 그림마다 다른 분위기와 구도를 가지고 있다. 때론 우주를, 가족과 마을, 아이들과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새도 똑같은 모습이 아니고 선 하나 도 지독히 고민을 많이 했다 한다. 가벼운 생각과 묘사, 비교적 동양적 여백을 활용한 그림, 지속 반복되는 나무, 새, 해, 달, 집 등 그의 주제는 늘 친근하고 색감도 아름답고 편안하다. 서양화가임에도 여백과 단순함, 자유로운 발상과 방법으로 보여준다.


세 번째 방에선 진진묘(眞眞妙)로 불교관과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서양화가지만 먹그림이 수묵화처럼 간결하고 대담한 필치로 보인다. 절제가 응축된 그림을 보면서 동물의 특징을 잘 뽑아내 갈겨쓴 듯 심플한 붓놀림이 어떤 동물인지 금방 알게 하는 능력이 있다. 특히 진진묘란 부인의 법명이다. 불교에 기반한 그림, 도자기에, 자유로운 먹으로 그린 수묵화, 마커로 그린 작품 등 자유로운 그의 세계와 닿아 있다. 특히 '가족'은 일본에서 오랜만의 나들이 작품이라 꼭 보시길 바란다. 엽서만 한 작고 어두운 그림이라 지나치기 쉽다.


마지막 방에선 비로소 화가로서 완성된 노년기 작품을 볼 수 있다. 담담하면서 해학이 담긴 밝은 필치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비워진 마음이 아니면 붓을 들지 않는다 했으니 맑은 거울이나 파란 하늘처럼 비워진 채 그림에 자기의 마음을 투영한 듯했다. 노년으로 갈수록 점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평생 그려왔던 까치, 나무, 해와 달, 가족을 주제로 그려냈다.


어떤 그림에선 도인 같은 여유가 묻어나고 열반이나 세상과 멀어진 듯한 기운을 느낀다. 마치 자기 그림의 완성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필체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림은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가족의 소중한 마음이 불현듯 떠오르고 모든 시공간을 초월한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붓으로 먹을 찍어 바르는 듯 힘 있으나 낭만과 여유가 풍긴다. 노년의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와 더불어 근대 화가로 불리는 장욱진은 양주에 장욱진미술관이 있는데 이렇게 도심 한가운데서 전시를 한다고 해 설레었다. 볕 좋은 날 나들이한 덕수궁엔 오랜만에 맛보는 여유와 도시 속에 있지만 가끔 와 볼 여유조차 없는 현대인에게 쉼을 주고 있다. 좋은 그림과 밝은 아이의 순수함을 보는 듯한 작가의 매력을 맘껏 느낄 수 있으니 그의 일대기를 보고 싶다면 이번 전시 놓치지 말기를, 명절 기간에 다녀가시길 권해드린다.


장욱진의 '가족',1955




#장욱진

#덕수궁현대미술관

#진지한 고백

#장욱진전시

작가의 이전글 팥죽의 간은 어떻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