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소리, 고요하게 비우다.
<사운드 오브 메탈>은 온전히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다시 찾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극이 시작되는 영화다. 청력, 문신, 흉터, 신뢰, 관계 등등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상징은 결국 한번 망가지면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청력은 되돌리기 어렵다. 한번 손상될 경우 100% 회복은 불가능하다. 영화는 과거라는 허상으로 돌아가려는 루빈을 통해 이미 무너진 것들을 다시 쌓아 올리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하여 묵묵히 보여준다.
주인공 루빈은 청력 상실이라는, 드러머로서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위기를 겪는다. 결국 여자친구 루와 함께하던 메탈 밴드를 잠시 중단하고 청각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세상과 고립된 채 수화를 배운다. 그와 동시에 루빈은 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모으려 노력한다. 그는 공동체에서 녹아들며 새 삶을 사는 방법을 배우고 동료들과 유대감을 쌓는다. 하지만 루를 홀로 버려둔다는 죄책감이 몰려오고 루빈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공동체를 이끄는 조는 루빈에게 우리는 청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바로잡는 것이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손상된 청각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조는 동료들에게 듣지 않아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려 한다. 따라서 그는 지붕을 고치고 있던 루빈에게 정색하며 ‘여기선 아무것도 고칠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한다. 고친다는 것은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이고, 이는 조의 신념과 반대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조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루빈은 마약 중독자였다. 주변 장애인 동료 중에도 중독자가 많았다. 결국 되돌아간다는 것은 암울했던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이기에 조는 굳이 청력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빈의 목표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루와 다시 밴드 활동을 하고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다. 루빈은 공동체에서 소리 없이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웠지만 루를 버릴 수 없었다. 루를 만나고 약을 끊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루빈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악기와 캠핑카를 처분한다. 이때 캠핑카 구매자가 생각보다 적은 금액을 부르자 루빈은 8주 안에 캠핑카를 다시 살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고 거래를 한다. 부자인 루의 아버지를 설득하면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보험을 들어놓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루빈은 수술을 받고 조는 그의 선택에 크게 실망한다. 루빈은 조와 공동체 사람들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가 되었고, 조는 그가 공동체에서 같이 일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루빈은 청각을 고치고 말았고, 조가 생각하는 신념과 완전히 반대되는 길을 가버렸다. 조가 수술을 받고 온 루빈을 맞이할 때 그는 탁자 위에 노트와 펜을 둔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조는 루빈이 공동체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과제를 내어준 적이 있다. 조는 루빈에게 5시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앉아있다가 도저히 앉아있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글을 쓰라고 요청했다. 인생에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저히 갈피가 잡히지 않을 때 사용하면 ‘다시 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는 말했다.
여기서 ‘다시 앉는다’는 무슨 의미일까? 드러머인 루빈의 입장에서 ‘다시 앉는다’는 것은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드럼을 치기 위해 드럼 키트 앞에 앉듯이 조는 루빈이 다시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루빈이 아이들과 둘러앉아 양동이를 두드리며 아이들과 교감하고 행복해했듯이, 공동체의 드러머로서 다시 앉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루빈은 돌아갈 수 없는 메탈밴드의 ‘그’ 드럼 키트로 돌아가 앉고 싶어 했다. 자신에게서 청력을 앗아간 메탈음악을 하며 혼자 남겨진 루를 돌보고 투어를 돌며 과거의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루빈은 돈이 필요하다며 제발 갚을 테니 돈을 빌려달라고 읍소했지만, 조는 그런 루빈의 모습이 마치 중독자 같다고 말한다. 조는 결국 루빈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판단한다. 조는 루빈을 정말 아꼈지만, 청각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그를 내쫓고 만다. (이 순간 배신, 슬픔, 연민이 뒤섞인 폴 라시의 연기가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렇게 루빈은 공동체를 떠났고, 그는 병원에서 이식한 기계를 테스트해본다. 부푼 기대를 찾고 병원에 찾아갔으나, 그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소음에 가까웠다. 의사는 그저 소리에 적응하라는 말만 해줄 뿐이다. 결국 루빈의 청력은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루빈은 루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고, 그렇게 둘은 재회한다. 이때 그는 루와 루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 것을 발견한다. 평소 아버지를 원망한 루이지만, 같이 노래를 부를 정도로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된 모습을 보여준다.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고 루빈은 루에게 다시 밴드 활동을 하자고 말한다. 이때 루는 팔을 다시 긁기 시작한다. 루는 평소에 팔을 긁는 버릇 때문에 항상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온 이후에는 긁지 않아 팔에는 흉터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자신과의 관계가 루에게 이제는 안정감이 아닌, 불안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빈은 괜찮다고 말하며 그녀를 떠난다.
루빈은 벤치에 앉아 주변 풍경을 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일렁이는 햇빛, 아이들이 해맑게 장난치며 뛰노는 모습, 탑 위에서 흔들리는 종소리까지 모두 소음으로 다가온다. 이때 루빈은 기계를 빼버리고 고요함을 받아들인다. 그제야 루빈에게 풍경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같은 풍경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루빈은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나뭇잎 사이 햇빛을 보며 루빈은 조가 말했던 천국을 생각했을 것이다. 고요함이라는 천국, 하나님이 사시는 평온한 왕국, 아무도 버리지 않는 그곳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젠 본인 스스로 만든 청각 장애인과 일반인, 그 사이의 애매한 존재를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사운드 오브 메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연출 방법은 역시 사운드에 있다. 소리가 언제 어떻게 끊기고 이어지는지를 통해 관객이 루빈의 심경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영화의 흐름에 따라 고요함은 절망이 될 수 있고 천국이 될 수 있다. 영화 초반의 고요함은 귀가 멀었다는 불안감, 고통, 막막함을 표현한다. 공동체 동료와의 식사 장면에서 수화를 하지 못하는 루빈을 보여주며 깔리는 고요함은 루빈의 답답함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 그 고요함은 평안함, 안정감, 소통의 한 방식으로 변화한다.
수술 후 듣게 되는 사운드는 마치 기계음이 섞인 소음 같다. 루빈의 기대와 동떨어진 소리에 루빈과 관객은 동시에 절망으로 빠져든다. 또한 루와 그녀의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또한 이 소음 섞인 소리로 들리게 해주는데, 평소 그녀가 부르지 않았던 장르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해져 이질적인 노래가 소음에 의해 더욱 기괴하게 들려 루빈의 불안한 심리와 불길한 예감을 잘 표현해준다.
병원에서 의사는 실제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듣고 있다고 뇌가 착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청력이 회복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속이는 방법인 셈이다. 결국 루빈이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사실은 사기였던 것이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고요함을 받아들인다. 그는 살아가며 고요함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건 루빈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영화는 그가 ‘다시 앉은 채’ 끝이 난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무섭고 잔인한 세상에서 그가 현실의 부조리함을 견뎌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