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30일
오늘은 아내와 나들이를 했다. 아내는 어제부터 연말 휴가를 냈다. 어제는 아내 피부과를 갔다가, 장인 장모님 댁에 가서 가족 모임을 했다. 그리고 오늘은 부부의 시간. 그래서 오래간만에 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미술관을 가는 건 즐겁다. 미술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영감을 받기도 하고, 기분이 리프레쉬가 되기도 한다. 아니면 그냥 겉멋이 들어서 그런 '있어 보이는' 것이 좋아서 일지도. 어느 쪽이건 미술관을 돌아다니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때마다 미술관을 가곤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아마 작년 가을 때쯤 처음 갔던 것 같다. 당시에는 미술관을 가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날씨도 좋으니 북촌에 나들이를 갔었다. 처음 갔을 때는 그냥 같이 나들이하는 게 좋았고, 사실 전시는 무엇을 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번에도 딱히 어떤 전시가 보고 싶어서 간 건 아니었고, 그냥 기억이 좋았어서 간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차 대신에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탔다. 차는 편하긴 하지만, 우리 부부에게 음주의 자유를 주지 않아서. 뚜벅이로 가는 게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막상 걷고 대중교통을 타 보니 기분이 좋았다. 연애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고, 오랜만에 바깥 풍경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았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여러 가지 전시를 하고 있었다. 이건희 컬렉션은 이미 오래전에 예약이 차있어서 들어가지 못했고, 나머지 전시를 봤다. 2021 올해의 작가 전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나쁘진 않았는데, 그렇게 마음에 남는 전시는 아니었다. 사실 현대 미술이라는 게, 작가의 개인적 철학과 맥락을 알지 못하면 깊게 빠져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정말 유명한 작가나,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작가가 아니면 작품 감상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런데 이후에 본 전시는 꽤 흥미가 갔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이라는 지역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성동'은 분단 이후, 남북한이 DMZ 근처에 마을 하나 씩 민간인이 사는 구역을 만들기로 해서 지정된 구역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UN 사령부 관할에 있다. 민간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또한, 이 지역 주민들은 32살이 될 때까지 이곳을 나갈 수 없다. 32살이 되면 이 지역에 남을지, 아니면 나갈지 선택해야 한다. 나간 이후에 다시 이 지역을 오려면 UN 사령관에게 허락을 맡아야 한다. 여기 주민들은 참정권과 교육의 권리는 있지만, 국방 및 납세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배우 박정민과 진영이 나온 자유의 마을에 관한 단편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고, 그 뒤에는 대성동의 실제 사진들이 나왔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에 대해 처음 알았고, 대한민국이 새삼 분단국가라는 것이 체감되었다. 여기서 자유롭게 미술관 나들이를 하고 있는 서울의 삶과 대성동의 삶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다음 전시는 중국 작가 '아이 웨이웨이'의 전시였다. 그는 중국의 반체제 작가로, 독재에 가까운 중국 정부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부조리한 체제에 맞서는 작품들을 만들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중국 공안들에게 쫓기는 영상뿐만 아니라, 홍콩의 반중국 시위, 죽음을 감수하고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들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가장 흥미로운 건 '빨래방'이라는 작품이었다. 난민 캠프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몇 개월 동안 입었던 실제로 입었던 옷을 마치 빈티지 샵처럼 행거에 걸어놓은 작품이었다. 이 옷들의 주인 중 대부분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처음 봤을 때는 무슨 옷인가 싶었지만, 작품 설명을 듣고 나니 옷들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난한 삶 속에서 싸우고, 체제에 저항하며 사는 사람들의 단상을 보니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작품들이 무척 재밌고 흥미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나와는 먼, 삶 자체가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겁게 다가왔다. 나는 이렇게 이 전시를 편하게 보고 있는데, 이 전시가 있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나의 편함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삶은 원래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가끔 삶의 부조리함을 목격할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 역 근처에 누워있는 노숙자들, 가끔 케이블 TV 광고에 나오는 기아들. 해결할 수 있지만, 해결하지 않는 세상. 이런 것들이 나를 덮쳐올 때, 나는 너무 무기력해진다.
집에 들어와 나는 갑자기 문득 생각이 나서 윤미래의 "시간의 흐른 뒤"를 들었다. 중학교 때 처음 들었던 노래인데, 아련한 느낌과 윤미래의 보컬이 여전히 너무 좋은 노래다. 이 시간도 흘러가겠지.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었다. 자세하지는 않았어도,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멋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됐다. 오늘 나는 사랑하는 아내와 '겉멋'든 나들이를 다녔으니까. 또다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오늘 내가 겪은 '부조리함'을 조금이라도 깨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