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나름 치열하게 고등학교에서 3년을 보낸 뒤 대학생이 된 나는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였고 금세 세상 밖으로 나가는 통로 어딘가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다양한 꿈을 꾸며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 공부하는 로봇이 된 것처럼 진도를 따라가기 바빴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래와 꿈에 대해서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된 나는 그런 생각을 꽤 오랫동안 가졌었던 것 같다.
대학교 초반에 나의 꿈은 '영화'였다. 시나리오 작가 혹은 스태프로 시작해서 최종적으로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을 꿈꿨었다. 영화를 어렸을 때부터 정말 좋아하긴 했었지만 꿈으로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날씨가 정말 좋았던 오후에 첫 수업을 듣기 위해 학교 정문으로 올라가면서 본 장면이 마음속 깊이 들어와 숨기고 있었던 마음을 꺼내 줬다. 학교 입구 언덕길에서는 영화영상학과 학생들이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로맨스 장면 중 하나였던 남녀가 서로 부딪혀 책을 떨어트리고 책을 서로 주으려다가 서로의 손이 닿아 부끄러워하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이 재밌어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영화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리고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해 줬다. 정말 좋아하지만 너무 멀리 있다고 느껴 꿈도 못 꿔본 분야였는데 가까이에 있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찍었던 사진>
그 이후 시나리오 공모전에 참여하여 글도 써보고 2년 연속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여해 필리핀, 호주 등 다양한 나라의 영화를 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필리핀 영화로 '내 신부를 찾아줘요'라는 영화였다. 그동안 코미디라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상당 부분 이해하고 있어야 웃음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을 제대로 깨 줬다. 그 영화를 통해 코미디 영화가 주는 행복과 힘에 대해서 크게 느꼈고 정말 많은 웃음과 기립박수가 절로 나왔었다.
하지만 인도 교환학생을 다녀오면서 나의 진로는 완전히 바뀌었다. 교환학생을 같이 갔었던 사람들 중에는 4학년인 선배들이 많았었는데 여러 가지 스펙과 높은 영어 점수 등이 있으면서도 취업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걱정하고 고민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였다. 인도로 교환학생을 온 이유도 스펙을 쌓거나 인도에서 인턴쉽을 찾으려고 온 것이었다. 그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취업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고 나와 나의 진로에 대해서 정말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불확실한 미래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할 용기가 나지 않아 많은 생각 끝에 인도에서 영화를 포기했다.
한국에 와서 수학과였던 나는 취업을 위해 공학 관련 복수전공을 계획한다. 수학이 순수학문이다 보니 진로가 막연하였기에 공학분야로 눈을 돌렸고 여러 학과 중에 일정 부분이 수학이랑 연관되어 있고 내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정보통신공학과 선택해 공부를 시작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시작한 정보통신공학 공부는 생각대로 나와 잘 맞았고 운이 좋게도 4.0이 넘는 높은 전공학점으로 대학교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대학 생활의 반 정도를 영화감독을 꿈꾸며 반 정도를 프로그래머를 꿈꾸며 살았던 나는 지금 금융 쪽에서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다. 20대 초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인생의 진로를 정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어렵고 힘든 것임은 틀림이 없다. 지금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분들, 그 과정을 거쳐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모두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가도 되는 것 같다. 나 또한 과거에 나를 만나면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