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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산일보 Jan 27. 2022

두 번 잊히고 싶다면

[바른말 광] 917. 두 번 잊히고 싶다면

‘기억은 잊혀지거나 소멸되기 마련이다.’

이 문장에 별 거부감이 일지 않는다면, 평균적인 한국어 사용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한데 문제는, ‘평균적’이라는 게 안심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 말글 오용이 심하면, 평균이 저 아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활용을 보자.


*소멸하다-소멸되다-소멸되어지다

*망각하다-망각되다-망각되어지다

이 활용에서 ‘소멸되어지다/망각되어지다’는, ‘소멸되다/망각되다’로 바꿔도 뜻이 충분히 통하므로 불필요한 겹피동 표현. 한데, ‘망각하다’의 순우리말 ‘잊다’를 활용하면 이렇게 된다.


*잊다-잊히다-잊혀지다

이렇게 보면, ‘잊혀지다’는 ‘망각되어지다’와 똑같은 겹피동 꼴인 셈. 결국 글머리 문장은 ‘기억은 잊히거나 소멸되기 마련이다’쯤으로 고쳐야 한다는 얘기다. ‘잊혀진 계절’은 ‘잊힌 계절’, ‘잊혀진 사랑’은 ‘잊힌 사랑’으로 써야 한다는 것. 뭔가 낯설고 어색해 보이겠지만, 자꾸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닫혀지다, 담겨지다, 묶어지다, 삶아지다, 심어지다’ 같은 어색한 표현은 ‘닫히다, 담기다, 묶이다, 삶기다, 심기다’로 고치는 게 좋을 터.


한데, 오늘날 한국어 사용자들은 쓸데없는 피동꼴을 너무나 많이 써서, 아래와 같은 글도 흔한 판이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어질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바른말 광’ 독자라면 이제 이런 글쯤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으로 보입니다’로 능숙하게 고칠 수 있을 터. 이러면, 글이 간결해지고 힘이 생기며 공간까지 절약할 수 있다. 거꾸로 해석하면, 자기 글에 자신이 없을 때 겹피동을 많이 쓴다는 말이 된다. 아래는 어느 시민이 TV 인터뷰에서 한 말.

“족발이 쫄깃하고 매콤해서 젊은이들이 아주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가져집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마저 피동꼴로 표현하다 보니, 겹피동도 자연스레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니 겹피동을 피하는 가장 좋은 약은 바로 자신감이다. 자기 글에 자신감을 가지려면, 생각을 자신 있게 해야 할 테고…. 자신 있는 생각은 깊은 사고와 많은 독서량에서 나올 테고….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1921~84) 시인의 ‘묵화(墨畵)’라는 시인데, 이 예쁘고 짠한 시에서도 ‘얹혀졌다’가 ‘얹혔다’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럴 때 보면 쓸데없이 끼어든 피동은 깨끗한 백자 달항아리에 앉은 티끌같이 보여 아쉽기만 할 뿐이다.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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