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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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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Sep 02. 2024

소설이 쓰고 싶다

소설이 쓰고 싶다.    

 

  간밤, 한승원 작가의 『키조개』를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은 감아도 귀는 열려 삐익 삐익 밤새우는 소리를 듣는다. ‘옴 마니 반메 훔’을 끝없이 외운다. 눈앞이 밝아진다. 살그머니 눈을 뜬다. 방안을 들여다보는 달빛, 놀러 나오란다. 달빛과 놀고 싶은 마음은 굴뚝을 오르는 연기 같지만 몸은 나른하다. ‘힘들어 못 나가. 잠신을 불러주면 어떨까.’ 나는 머릿속으로 속삭인다. ‘괜찮아. 오랜만에 보는 달빛이잖아. 잠 그것도 살아있다는 거야. 즐겨.’ 그래도 나는 몸만 뒤척일 뿐 일어나지 못했다. 달빛은 처연한 눈망울로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쉰다. 


  평생 짝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키조개를 캐는 남자, 현실에서 소설 속 남자처럼 풋 늙은이가 되어도 첫사랑에 목을 매는 순정파가 있을까. 전남 고흥, 연꽃바다를 그려본다. 바다의 삶과 육지의 삶은 차원이 다르다. 나는 산속에 살아도 산이 그리운 것처럼 바다에 사는 사람은 바다를 보면서도 바다가 그리울 것 같다. 온갖 전설과 신화가 숨 쉬는 우리네 삶이다. 전설과 신화를 잃어버리고 강퍅하게 사는 사람이 많아서 소설이 팔리는 것은 아닐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마음을 톺아본다. 잠은 멀리 달아나고 굳이 잠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꿈의 미로에 갇혀 있어도 머릿속은 현실을 반영한다. 

 실눈을 떠보면 달빛이 흐릿한 안갯속을 느리게 걸어간다. 


 <잠 안 오는 밤>     

 달빛이 창가에서 속삭입니다.

 그림자놀이 하자.

 기운이 달려 못 나가.

 일어나 봐. 

 달빛이 자꾸 보챕니다. 

 나는 끙 몸을 일으킵니다.

 가볍게 달빛을 따라갑니다.

 돌아보니

 나는 방안에 누워 있고

 혼백만 마당을 서성입니다. 


 달가닥 소리에 잠을 깼다. 새날이 밝았다. 창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햇살 나올 모양이다.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농부에게 슬쩍 운을 뗐다. 

 “고추가 물러 터지더라. 탄저병도 왔고, 따야겠어.”

 “안 따고 전체가 붉어지도록 두면 안 되나?”

 “먼저 붉어진 것 안 따주면 고추나무가 망가질걸. 끝물이라면 그냥 두도 되지만 첫물이잖아. 비가 잦으니 태양초 만들기 힘들겠다. 우리 양념할 정도만 거두면 좋겠는데.”

 가볍게 아침을 먹고 소쿠리와 작은 가위를 챙겼다. 

 “당신은 걸린다. 구경만 해라.”

 농부는 한 발 앞서 완전무장을 하고 밭골에 앉는다. 

 “얼마 되지도 않는데. 혼자 해도 잠깐이다.”

 “통실통실한 고추 맛을 봐야지”

 

 농부와 나는 이쪽과 저쪽 밭골에서 마주 보며 붉은 고추를 딴다. 한승원 선생의 『키조개』를 떠올린다. 작가는 한 사람의 밋밋한 일생도 치열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바꿀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을 자신이 읽어도 재미있어야 한다. 

 

 오래전 삼천포 여행길에서 제주 해녀를 만났었다. 노산 공원 아래 바위너설에서 노점상을 하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물질을 해서 키조개와 해삼을 따다 관광객을 상대로 소주와 회를 팔았다. 해삼은 징그러워 싫었지만 키조개는 볼수록 예뻤다. 곡식을 까부는 키를 닮은 조개를 처음 봤다. 엄청 큰 키조개를 샀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회를 쳐 주셨다. 소주와 함께 짭짜름한 바다 향을 마셨다. 키조개 맛에 반하고 알딸딸하게 오르는 술기운에 취해 할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제주에서 물질을 하던 처녀라고 했다. 열일곱 살에 삼천포 뱃놈을 따라왔단다. 뱃놈은 꽃물만 빨아먹고 바다에 나가 죽고 할머니는 물질을 해서 먹고 산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소설의 씨앗 하나 주워 왔지만 나는 아직 해녀 할머니 이야기는 머릿속에만 있다. 그때 내가 먹은 키조개 껍질 네 개를 잘 말려 오색 광이 나는 안벽에 네 편의 자작시를 쓰고 물감으로 그림도 그려 넣었다. 예뻤다. 키조개 귀에 구멍을 뚫어 색실로 묶어 서재에 걸어놨었다. 시집올 때도 가져왔었다. 어느 날 술이 얼큰하게 취해 들어온 농부가 키조개에 적힌 시를 문제 삼았다. 나는 두말도 않고 키조개 네 짝을 걷어다가 마당에서 산산조각을 냈었다.

 

 삼십 수년이 흘렀다. 여태 농부는 키조개 이야기를 입에 올린 적이 없다. 나는 키조개에 썼던 시도 잊어버렸다. 가끔 어떤 시였는지 궁금하다. 시인으로 불리던 나, 수필가로 불리다가 지금은 소설가로 불리지만 나는 여전히 촌부다. 나는 풋 늙은이가 되어 한승원 작가의『키조개』보다 더 흡입력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늘 생각에 그치고 만다. 삼백육십 오일 소설이 쓰고 싶을 때는 외적인 일로 틈이 없었고, 한가해진 지금은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오호, 통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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