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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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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11. 2024

유월의 푸름 앞에

 유월의 푸름 앞에       

   

 아침 여섯 시면 창을 연다. 상큼한 바람에 심호흡을 한다. 창밖을 바라보면 밤새 훌쩍 자란 나무와 풀들이 이슬에 젖어 풋풋하다. 건너편 다랑이의 갈잎 억새는 의붓자식처럼 푸른 풀밭에서 겉돌고 들 가운데 저수지에선 연기처럼 안개가 피어오른다. 아름드리 육송이 어우러진 집 옆의 작은 못은 참선하는 스님의 표정 같고 하늘은 맑고 깊어 눈이 시다. 

 자연은 늘 그대로의 자리에서 빛이 나는 것일까. 나는 늘 깨어 있길 원한다. 내 귀가 열리어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내 마음이 열리어 풀잎 하나에도 애정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산책길에 나선다. 파아랗게 자란 잔디밭을 지나 닭장 문을 열어 주고 개와 염소들의 문안 인사를 받는다. 수탉의 맑은 소프라노가 숲을 깨우고 골짜기를 오르는 안개가 날씨를 예감케 한다. 

 산길은 모롱이 하나를 돌 적마다 더 가팔라져 오고 두 모롱이를 돌아 오르면 등에 땀이 밴다. 길섶에 수북이 자란 넝쿨과 풀잎 사이로 빠알갛게 익은 산딸기며 보랏빛 개싸리꽃, 하얀 망초꽃, 노르스름한 인동초꽃 등 유월의 들꽃이 향기롭다.

 산먼당까지 다녀오면 한 시간이 걸린다. 끼니를 챙기고 아이들을 닦달하고 청소를 한다. 하루의 문을 여는 셈이다. 초등학생인 두 아이를 태운 남편 차가 집을 나서면 마당가에 심은 풋고추랑, 들깨, 호박 사이의 지심을 맨다. 바랭이, 메꽃, 질경이, 비름 등 끝도 없이 자라는 풀을 뽑는다. 

 풀잎에 이슬이 깨면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일을 시작한다. 개죽을 챙겨 주고 염소 떼를 산으로 내몰고, 분만실에 있는 어미 염소의 먹이를 챙겨 주고는 낫을 들고 길섶으로 나간다. 풀을 벤다. 해산한 염소에게 먹일 풀이다. 다람쥐와 들쥐가 달아나고, 새들이 날아오른다. 

 풀 베는 일은 재미있다. 손아귀에 가득 잡히는 풀의 감촉도 좋으려니와 향긋한 풀냄새며 깨끗해진 길섶에 쌓이는 풀 더미를 보고 있으면 논두렁 깎던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들일을 해 본 경험이 적었던 새내기일 때 시어머니의 낫질 솜씨에 반했었다. 어머님이 꼴을 베어 놓으면 나르는 일이 내 몫이었다. 나는 그 일보다 논두렁을 말끔하게 깎아 보고 싶었다. 하루는 어머님이 꼴 베기가 힘들다는 푸념을 하셨다. '그럼, 어머니 제가 하겠습니다.' 낫질엔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며 리어카를 끌고 소꼴을 베러 갔다. 리어카 끌기도 기술을 요하는 데 낫질 하기는 더 힘들었다. 꼴은 세네끼(쬐끔)나 베고 손가락만 베었다. 어머니께 나는 아무나 낫질하는 것 아니라는 핀잔을 들었지만 틈만 나면 낫 들고 들에 나갔다. 그렇던 낫질이 이제는 능숙하단 소릴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세발 리어카(손수레)에 풀을 담아 나르고 나면 개 우리 청소를 한다. 침을 퉤퉤 뱉어 가며 날 좋다고 달려드는 개들에게 발길질도 해가며 예쁜 짓 하는 녀석은 쓰다듬어 주기도 하며 청소를 끝낸다. 

 오전 일이 끝나면 차 한 잔의 여유도 갖는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고 신문을 본다. 가끔은 못 둑에 나가 들꽃을 꺾어다 항아리에 꽂기도 하고 산딸기를 따기도 한다. 

 지난해는 산딸기가 풍년이었다. 아이들과 산딸기를 한 소쿠리 따서 시댁에도 보내고 딸기잼도 만들었다. 아이들 간식용으로는 제격이었다. 

 나는 나만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다. 잠자리에 누워 귀한 시간을 축냈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 단조로운 일상을 살찌우기 위해 노력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리울 때도 있다. 뜬금없이 걸러 온 전화가 반갑고 친구라면 서로의 사는 이야기에 시간을 잊기도 하고 산골바람 쐬러 오지 않겠느냐고 재촉도 한다. 

 짐승을 키우고 사는 생활이라 밖에 나가기가 어렵다. 벼르고 별러서 집을 나서면 짐승들 먹이 걱정에 세상이 온통 요지경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나 혼자만 자꾸 작아지는 느낌이 들고 이방인처럼 여겨진다. 그럴 땐 서둘러 돌아온다. 돈이 없어도 풍요로울 수 있고 가식 없이 살 수 있는 산 속의 보금자리가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개들이 아우성을 친다. 

 염소들이 숲에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산길 여기저기에서 한 무리씩 집으로 들어온다. 어린것은 어미 찾아, 어미는 어린 것 찾아, 외톨이는 무리 찾아 운다. 

 나는 나뭇가지를 들고 염소 떼의 뒤꽁무니를 쫓는다. 올라가! 내려가! 외치며 뛰어다니다 보면 옷이 젖고 목이 칼칼해진다. 때론 샛길로 내 빼는 녀석이 있어 속상하다.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풀을 뜯거나 눈 말똥히 뜨고 빤히 쳐다보면서 옆길로 새는 녀석에게는 돌멩이를 주워 잔등을 후려치기도 한다. 돌팔매 솜씨가 갈수록 는다.

 염소들은 군중심리가 강하다. 한 마리가 풀 섶으로 뛰어들면 처음엔 망설이던 녀석들도 우르르 따라간다. 그럴 때는 아예 염소 막에 들어와 느긋하게 쉬는 염소들까지 쫓아내 버린다. 

 산비탈을 가볍게 타고 다니는 염소를 보면 갓 이사 와서 겪은 고생이 생각나 웃음 짓기도 한다. 사람도 짐승도 다 미련퉁이처럼 굴었다. 나는 염소를 산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안간힘이었고 염소는 앞이 훤히 트인 길 쪽으로만 내달리려고 해서 왼 종일 실랑이를 치곤했다. 

 축사 뒤편은 산이다. 속이 꽉 차 있었다. 수 십 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숲은 넝쿨과 잡목의 천국이었다. 궁리 끝에 겁 많은 염소들의 길잡이가 되기로 했다. 칡넝쿨로 유혹하면서 낫을 들고 나뭇가지를 치고 풀을 베어 길을 뚫었다. 내 뒤만 쫓던 염소들이 한 달이 지나자 스스로 산을 탔다. 사람과 짐승이 같이 숲을 좋아하게 되었다.

 숲에서 염소 한 마리가 예닐곱 마리의 염소에게 시달리고 있다. 교미기가 온 암컷이었다. 염소는 윤리 도덕이 형편없다. 어미젖을 빨다가도 어미 궁둥이 냄새를 맡고 어미 등에 올라타기도 하고 입을 헤벌리며 좋아하는 것이 수컷이다. 우두머리가 있는 데도 워낙 일부다처제니 우두머리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어린 수컷의 무리에서 암컷을 다 보호하지 못한다.

 가끔은 제 어린 새끼에게 젖도 못 물리고 시달려 야위는 암컷이 있다. 보고 있기가 안쓰러워 분만실에 가두기도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갇힌 암컷이 기를 쓰고 나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제 새끼를 같이 넣어 주어도 새끼는 안중에 없었다. 나중엔 그들만의 애정 표현이 그런 것이구나 싶어 암컷이 한숨 돌리고 나면 풀어놓았다. 자연 방목을 하는 탓에 짝짓기도, 분만도, 젖떼기도 체계적으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가끔 어린 새끼가 새끼를 낳아 놓고 신기한 물건 보듯 구경하다가 빼빼 우는 어린것이 신기한지 다가가 뿔질을 하거나 도망 가 버릴 때는 내 잘못 같아서 속앓이를 한다. 그 어린것을 미아 만들지 않으려고 어미와 새끼를 분만실에 가두고 처음엔 한사코 도망가려던 어린 어미를 억지로 잡아 새끼에게 젖을 물리면 그제야 겨우 모정에 눈을 뜬다.

 염소들도 갖가지다. 제 새끼를 잘 챙기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혹 떼어버리듯 저만 편한 녀석도 있다. 어수룩한 어린것은 제 어미를 못 찾아 목이 쉬도록 울다가 제풀에 지치기도 하고, 약삭빠른 어린것은 남의 어미젖도 요령껏 훔쳐 먹으며 자란다. 

 산 속에는 어둠이 빨리 내린다. 염소들은 서산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다. 귀소 본능이 강한 동물이라고 한다. 

 나는 염소들이 거의 귀가를 하고 나면 개죽을 끓인다. 큰 무쇠 가마솥을 마당 구석에 걸어 놓았다. 농가에서 집집마다 쇠죽 끓이던 쓰임새가 없어진 가마솥은 녹 쓴 채 버려 진지 오래다. 그 솥을 구해다 개죽 솥으로 사용한다. 아궁이에 삭정이를 모아 불을 붙이고 앉아 있으면 농촌 살이 십 년이 엊그제 일처럼 느껴진다. 

 남편과 연애 시절, 처음 들어선 시댁 마을은 참 평화로웠다. 실개천이 마을 앞을 지나고 들이 오밀조밀하게 펼쳐진 들 가운데 마을이었다. 개천가의 버드나무 가지에 지은 까치집에 반하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참새와 까치의 지저귐에 잠을 깨었고 이슬이 촉촉하게 젖은 들길을 걸었고 맑고 깊은 개천가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하는 아주머니를 보았을 때 내가 그리던 삶이 여기 있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듬해 봄, 나는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 친정과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직장에 사표를 내고 시댁으로 들어왔다. 행복했다. 모 밥을 이고 논두렁을 가는 것도, 열 동의 하우스 안에 자라던 고추며 메론, 수박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기 때문에 고된 줄도 몰랐다. 녹색의 장원은 나날이 신비감을 더해 갔다.  

 그러나 그렇게 3년을 살고 나니 슬그머니 불만이 고개를 내밀었다. 농사짓기가 갈수록 버겁게 느껴졌고 아랫돌 빼서 윗돌 공구는 격인 살림살이가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던 차에 남편의 건강이 나빠져 하우스 농사를 포기하고 표고버섯 재배를 시작했지만 UR의 거센 물결에 밀려 밑천만 날리고 막을 내려야 했고, 애써 농사지은 마늘을 헐값에 차지하려는 중간상인에게 넘기지 않으려고 직접 판매에 나섰던 적도 있다. 마늘을 트럭에 싣고 대도시의 아파트촌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해보았지만 남편도 나도 상술에는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만 쉬었다. 

 농촌 살이 갈수록 힘들다고 느끼자 생활 전체가 흔들렸다. 일 년 열두 달 쉴 틈 없이 일하는 것도 내 숨통을 막았고 일도 많았다. 벼 보리농사, 마늘 고추 콩 밤농사에다 마구간에 한우도 키웠다. 어쩌면 그 힘듦은 남편과의 성격 차이에, 시집살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여고 적부터 혼자 살아온 습관을 고치기도 힘들었고 문중의 대소사가 최우선 순위였던 시댁의 더 센 유교 가풍에 대한 반발심이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내 딴엔 한다고 하는데도 들일은 몸에 익지 않았고 집안일은 또 산 너머 산이었다. 그 사이에도 시누와 시동생을 출가 시켰고 부엌 개량을 겸한 집수리도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도 책도 읽을 여유 없는 삶에 대해 마음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어미였고, 농촌 살이 정이 붙을 만큼 농촌 아낙네가 되어 있었다. 

 나 때문이었을까. 남편은 분가를 하자고 했다. 남편은 염소를 키우고 싶어 했고 경험이라곤 축사에 한우를 키워 본 것 밖에 없었다. 나도 시부모님도 분가를 반대했지만 아무도 남편의 옹고집을 꺾지 못했다. 

 시집살이 만 5년 만에 분가를 했다. 시댁에서 빤히 올려다 보이는 산자락 끝 마을의 남의 빈집을 빌어 이삿짐을 옮겼다. 그 집에 들어섰을 때에 장독간에 개나리가 소담하게 피어, 빈손에다 농협 부채만 잔뜩 지고 들어온 우리를 반겼다. 돌담이 앙증맞게 둘러쳐진 텃밭이 넓은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을 <마당 깊은 집>이라고 불렀다. 

 그 집에서 1년 4개월을 살았다. 텃밭에 채소도 가꾸고, 강아지와 염소도 치며 시댁을 오가며 농사도 지었다. 그 사이 농한기를 이용해 현재의 이 곳에 터를 다져 집을 지었다. 마을에서 오리쯤 떨어진 산 중턱 외딴 집이다. 

 남편 따라 처음 집터를 보려 왔을 때는 묵정밭이 된 다랑이가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금세라도 멧돼지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무서웠다. 남편과 또 싸우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 골짝에 가서 못 살겠다는 나와 어쨌든 그 곳에서 염소를 키우겠다는 남편과 열불 나게 다투었다. 

 남편은 자기 고집대로 일을 시작했다. 포크레인으로 다랑이를 밀어 축사 터와 집터를 닦았고 과실수를 집터 주변에 심는 정성도 보였다. 내 마음이 남편을 따르자는 쪽으로 돌아 선건 두 번째 이 곳에 와 보았을 때다. 집터 주위에 빙 둘러 심은 나무에서 잎눈이 터지고 있었고 집 주변엔 온통 꽃 천지였다. 꿩 새끼가 덤불 속에서 떼를 지어 다니며 병아리처럼 삐악거렸다. 

 남편은 나무 심은 곳마다 물을 주며 염소 농장의 꿈을 이야기했다. 그 눈빛에 깃든 의지에 반했던 것일까. 터를 둘러싼 자연 경관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이 집은 짜깁기하듯 지은 집이다. 자투리 베를 모아 예쁜 밥상보며 베갯잇을 만들듯 남의 헌집 뜯어낸 서까래, 하우스 골재, 헌 문짝 등을 주어다 자르고 닦고 맞추었다. 우리 집 문은 제대로 아귀가 맞는 것이 없다. 대신 흙 한줌 블록 한 장 문짝 하나에도 땀과 애정이 듬뿍 담겼다. 남편은 목수가 되기도 하고 미장공, 용접공, 전기공, 막노동 일꾼도 되었다. 나는 어정잡이 중노미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만 이 집을 사랑한다. 식수도 처음엔 골짜기에 호스를 대어 물통에 받아 사용했지만 지난 가뭄에 지하수를 팠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집 무너질까 겁난다고 농담을 한다. 거대한 삼풍백화점이 부실 공사로 무너지는 판에 우리 집은 그 보다 더 부실 공사니 겁나지 않겠느냐고 해서 웃는다.

 나는 개죽을 끓여 퍼 놓고 염소 막에 오른다. 

 마을로 내려 간 햇살이 모내기가 끝난 논에 앉았다. 

 염소들을 축사에서 운동장으로 내쫓고 배합 사료를 구유 통에 붓는다. 하루 한 끼 저녁에만 사료를 입맛 버릴 만큼 준다. 소금도 퍼다 소금 그릇에 담아 놓는다. 호루라기를 불고 축사 문을 열어 준다. 호루라기 소리는 바람을 타고 등을 넘는다. 길 잃은 염소나 느림보 염소들이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돌아오기도 한다.  

 산 생활 첫해는 배합사료를 전혀 주지 않았더니 여름이 되자 염소 막이 텅 비어 버렸다. 염소들이 골짜기가 있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산에서 아예 내려오지 않고 한뎃잠을 자는 것이었다. 골짜기에 내려가 물먹고 너덜겅이나 벼랑 위의 너럭바위에서 잠을 잤다. 

 나는 날마다 염소를 찾아 산을 헤맸다. 염소 떼가 어디 있는지 살피고 솔가지나 높은 칡넝쿨을 낫으로 쳐내려 주었다. '염소야 어디 있니?' 내 고함소리에 '음매에!' 하고 대답하는 소리만 들어도 안심이 되었고, 내 주위로 몰려와 인사를 하는 염소 떼를 볼 땐 가슴이 뿌듯했다. 때론 산짐승에게 뜯겨 먹힌 흔적도 발견하고 구더기와 개미가 우글거리는 주검도 보았다. 가슴이 아파서 왜 집으로 오지 않다가 이런 꼴을 당했느냐고 군담도 했다.

 산 속은 신비롭다. 

 염소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서일까. 나는 숲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감미롭다. 길을 가다가도 풀이 무성하고 잡목이 우거져 있으면 우리 염소 생각을 한다. 염소 떼를 몰고 와서 그 곳에다 풀었으면 싶다. 

 그 해 겨울, 염소들이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등산객들이 염소 몰이를 해서 염소를 잡아 왔는데 그 집 염소가 아니냐며 전화를 해 주어 염소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염소를 다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 조바심 쳤다. 집에서 능선 몇 개를 넘어야 하는 산 정상에서 염소 떼를 보았다는 소문도 들렸다. 더 추워지면 오겠지. 가랑잎마저 다 사그라지면 오겠지 하면서 기다렸다. 그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 

 어느 날 내가 산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자 내 뒤를 따르는 서너 마리의 염소가 있었다. 염소 막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사료와 소금을 챙겨 주었더니 맛있게 먹고는 다시 산으로 가 버렸다. 어찌나 실망스러운지 가두어 두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열 마리, 스무 마리…그렇게 육십여 마리의 염소가 들어왔다. 새끼였던 염소가 어미 염소가 되어 새끼를 달고 들어오기도 했고 낯익었던 염소가 보이지 않아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그 이듬해 봄이었다. 나물 캐러 갔던 마을 아주머니들이 능선 서너 개 너머 골짝에 염소 무리가 있더라고 했다. 남편은 친구들과 산 속을 샅샅이 뒤졌지만 허탕을 쳤다. 염소가 있었던 흔적은 발견했지만 염소 무리는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나랑 같이 가' 나는 남편을 앞세우고 그 골짝을 찾았다. 

 "염소야! 어디 있니? 대답해!"

 나는 목청껏 염소를 불렀다. 분명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매에!"

 가느다란 염소 울음이 들렸다. 참 희한한 느낌이었다. 목구멍에 울컥 솟구치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부르고 염소는 답하고 덤불을 헤쳐 가며 가시에 긁히면서 소리를 따라갔다. 골짜기 바위 위에서 여섯 마리의 염소가 빼꼬롬이 내다봤다. 그 눈빛에는 나를 안다는 듯이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도망도 가지 않고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으며 경계를 했지만 틀림없는 우리 염소였다. 남편과 염소 몰이를 해서 잡으려고 애썼지만 이미 야생에 길든 염소는 빨라서 잡을 재간이 없었다. 멀리 도망도 가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면서 잡힐 듯하다가 도망가기를 거듭했다. 나중에는 지친 남편이 포기하자는 쪽으로 돌아섰다. 

 "당신은 저 아래 멀리 가 숨어 있어. 내가 해 볼게."

 나는 남편이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올가미와 끈을 던져 버렸다. 솔가지를 꺾어 내밀며 속삭였다. 

 "염소야, 이리 온. 우린 친구잖니. 보고 싶었단다. 더 추워지면 어쩌니. 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자. 길을 잃어 집에 못 왔구나. 나랑 같이 가자."

 나는 그 염소 중 리더 격인 염소가 나를 기억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염소들은 멀리 도망가도 그 염소만은 내 주위를 맴돌며 자꾸 울었다. 한참을 밀고 당겼다. 그 염소가 조금씩 다가왔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편안하게 앉아 솔가지만 내밀었다. 염소는 경계심은 늦추고 다가와 솔가지를 뜯어먹었다. 잽싸게 염소의 뒷다리를 잡았지만 별 반항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 염소야. 나를 잊지 않았구나. 고마워."

 나는 감격해서 자꾸만 염소의 목을 쓰다듬었다. 

 "여보 목사리 가지고 와!"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남편이 염소를 잡고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던진 말이다. 

 그 염소를 몰고 산길을 내려오자 나머지 녀석들은 졸졸 잘도 따라왔다. 그 후에도 서너 번 그렇게 염소를 찾아왔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주인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했다. 

 차 소리가 들린다.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딸기 덤불로 달려간다. 커다란 칡 잎을 따서 딸기 바구니를 만들어 손바닥에 올리고 딸기를 딴다. 

 "엄마, 작년처럼 딸기잼 만들어 주셔요."

 아이처럼 탐스러운 붉은 열매는 전원생활의 행복이 아닐까. 

 나는 자연 앞에서 늘 겸손을 배운다. 마당가의 어린 나무들이 키 넘게 자란 유월, 동물 농장의 나날은 푸름을 먹고산다. 

 숲이 푸석거린다. 염손가 싶어 보니 송아지만 한 노루가 다랑이를 뛰어간다. 작은 못에서 푸름을 마시고 가는 가 보다. 

 "와아, 노루다."

 아이들의 환호에 유월의 숲은 더욱 푸르다. 

 자연!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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