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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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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20. 2024

아집을 허물면 여유로워질까

아집을 허물면 여유로워질까.   


  

 사람은 누구나 맹목적일 수 있다. 맹목적이란 무엇인가. 사물이나 사상에 대해 무비판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보다 자신이 믿는 것을 무조건 지키려는 의지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있어 이성적인지 비이성적인지 조차 판단하려고 들지 않는다. 어쩌면 그 사람의 무의식 속에 깃든 판단일 수도 있다. 자신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믿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맹목적인 복종이나 추종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늘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다. 노인이 되면 소통하기가 편할 줄 알았지만 나잇살 늘수록 더 힘들어진다. 나이 들수록 남편과 아이들과도 소통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왜 그럴까. 내가 문제다. 내 아집이 문제다. 애들이 농담처럼 말한다. ‘우리 엄마, 자꾸 꼰대가 되어간다.’ 왜 그럴까. 아집이 고착화되는 과정은 아닐까. 여태 읽었던 수많은 책들조차 무의미해진 것일까. 내 머릿속에는 무엇이 든 것일까. 꼰대 근성이 강해진다는 것은 편협하고 독선적인 마음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어쩌면 나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살아갈수록 가면을 쓰는 것 같다. ‘저 사람 자꾸 얼굴이 두꺼워진다. 징그럽다. 나이 값 좀 하고 살지.’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 얼굴이 두껍다는 것, 얼굴이 두꺼워진다는 것. 좋은 뜻은 아니다. 잘못했는데도 잘못한 줄 모르는 뻔뻔함, 염치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는 뜻이다. 안하무인이고 능글맞고 제멋대로 군다는 뜻이다. 나이 들수록 나도 얼굴이 두꺼워지는 것 같다. 내 뜻대로 안 되면 팽 토라지고 귀를 꽉 막아버린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너는 네 말을 하는 것 같을 때 소통의 부재를 느낀다. 내 마음의 행로를 말해도 이해받기 어렵다고 미리 선을 긋기 때문은 아닐까. 말해 봐야 본전도 못 건진다고 하든가. 차라리 말 안 하는 것이 속 편하다. 


 내가 내 속으로 웅크려들수록 외로움은 배로 커진다. 노인이 될수록 외로움에 시달린다는 말은 진실이다. 사람이 그리운데 사람 만날 일이 자꾸 줄어든다. 가까운 마을회관조차 드나들기 힘들어진다. 회관에서 만나는 선배 노인들과 수다 떠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건성이기 일쑤다. 혼자 있어도 외롭고 여럿이 있어도 외롭다. 자식들, 손자손녀 자랑을 들어도 가슴에 허한 바람이 분다. 몸은 늙고 늘 아픈데 마음은 젊은 날에 잡혀 있다. ‘내가 왜 이러지?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렇다. 젊을 때는 몰랐던 뼈마디 쑤심, 소화불량, 입맛도 까다로워진다. 맛있는 음식도 없다. 


 입버릇처럼 ‘죽어야지.’하면서 죽지도 못하는 노인의 삶, 할 일을 찾아 잰걸음 쳐 보지만 힘에 부친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여러 가지 푸성귀가 자란다. 김도 매지만 금세 지친다. 호미를 잡고 김을 매는 것도 맨손으로 흙을 만지는 것도 중노동에 속한다. ‘엄마, 아프다면서 왜 일을 해. 아무것도 하지 마.’ 자식들은 일을 못하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누굴 위한 말일까. 엄마를 위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말일 수 있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아들이 쪼그라지고 늙어버린 부모를 보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고 아프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다. 노인이 아닌 자식은 노인이 된 부모를 겉모습으로는 아는데 속내는 모른다. 자신이 노인이 되어봐야 부모 속을 안다. 


 추석연휴가 끝나고 남매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명상 갔던 농부도 돌아왔다. 오랜만에 집 밥을 먹는다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농부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생활이 좋은 것 같다. 침묵명상이라고 알고 있다. 10일 코스 3년 하고 20일 코스를 다녀왔다. 다시 10일 코스를 갔다 온 그는 30일 코스를 가겠단다. 아내 허락이 필요하단다. 아들의 방학기간을 택했다. 내 보호자로 낙점된 남매도 당연히 다녀오라고 한다. 나도 그런 공동체에 들어가 명상을 하고 싶지만 몸이 안 따라준다. 어쩌면 환자를 자칭하는 것은 내 집이 편하기 때문일 게다. 


 남매가 없는 집은 조용하다. 우리 부부는 각자다. 필요한 말 외에 말도 필요 없어진 사이가 오래 산 부부 전형 아닐까. 영화를 봤다. 『45년 후』, 결혼 45주년을 맞은 늙은 부부 이야기다.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의 삶을 생각한다. 아내가 결혼 45주년 행사를 거창하게 진행하고 있다가 남편의 방황을 눈치챈다. 남편의 죽은 옛 애인의 등장이다. 스위스 산악지대, 빙하가 녹으면서 그 틈새에 빠졌던 옛 애인의 시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남편의 방황은 아내에게 충격적이었다. 평생 죽은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 아내 몰래 그 여자를 품어온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된 아내,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결혼 45주년 행사는 거창하게 치러졌지만 아내는 남편과 춤을 추다 매정하게 남편의 손을 뿌리쳐버리며 영화는 끝난다.


 노인의 길을 걷는 부부는 서로 반목하기보다 다정다감하게 서로를 품어주는 정으로 사는 것이 현명하지만 그 정이란 것도 일방통행이면 문제의 발단이 된다. 부부는 오랜 기간 함께 살며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길들여진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타성에 젖어 살기도 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맹목적일 수 없다는 거다. 어린 시절부터 가부장적 사고에 길들어 살아온 남편일 경우 노인이 되어갈수록 아내의 맹목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아내라면 맹목적일 수도 있겠다. 그 사랑이 흔들리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미움이나 분노조차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몸 따로 마음 따로 살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일상은 고요할 수 있다. 


 고인 물은 썩는다. 물은 끊임없이 흘러야 썩지 않는다. 아집이 문제일까. 아집을 허물어버리면 서로가 편해질까. 아집을 허물고 있는 그대로 보기,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있는 그대로 믿기를 실천한다면 삶이 여유로워질까. 나는 농부를 가만히 바라본다. 농부의 얼굴에도 주름이 늘었다. 우리 잘 살아왔고, 잘 살아가겠지요? 내 눈빛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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