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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Oct 24. 2024

인연, 굴레를 벗다

<장편소설. 1-4>

 새벽부터 눈이 내렸다. 하얀 목화송이 같이 탐스러운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하얀 눈빛이 창문을 통해 작은 방안을 비추었을 때, 나는 날이 샌 줄 알고 다급히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건너편 산이 온통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제 빛을 잃어가는 것이 서러운 가로등이 주황색 빛을 애써 비추고 있었다. 나는 간밤에 꾸려 놓은 배낭을 짊어지고 방안을 빙빙 돌았다. 귓불이 화끈거렸다. 그의 가슴에 안긴 것처럼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사무실에서 오전 내내 그 눈을 바라보며 안달을 했다. 눈이 너무 많이 오면 산행에 지장이 생길지 모른다는 조급증에 시달리면서 연신 창밖만 바라보았다. 

 "석혜야 이렇게 눈이 오는데도 산에 갈 거니? 너 오늘 보니 꼭 첫사랑의 열병에 걸린 소녀 같구나. 서른이 넘은 노처녀가 저러니 독신녀 선언한 여자들 말짱 거짓부렁이 아닌지 몰라. 너무 그러지 마라 시집살이 하는 내 신세 처량해진다."

 "나 시집갈지 몰라."

 "진짜? 언제? 어떤 사람인데?"

 이미 두 아이의 어미인 사무실 친구 숙희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다음에 말해 줄게."

 "왜? 혼자 사는 것이 힘들었니? 난 너의 자유를 가장 부러워하며 위안 삼았는데 갑자기 섭섭해지네. 그래. 시집은 가야겠지. 누구나 다 시집가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왜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을까? 아마 요즘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가봐. 이해해라."

 "숙희야. 너 많이 힘든 모양이구나. 또 무슨 문제야?"

 "늘 하는 소리지 뭐. 나도 너처럼 저렇게 눈 오는 날 사랑하는 사람과 등산이라도 갔으면 원도 없겠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 귀에는 곧이들리지 않겠지. 남자들은 왜 그럴까? 결혼 전과 결혼 후가 너무 달라. 남자들은 여자가 일단 제 마누라가 되고 나면 멋도 낭만도 없어지나 봐. 원하는 것은 여자의 순종과 노예근성이야. 맞벌이를 하는데도 여자는 집안일에서 육아까지 혼자 책임을 지면서 돈까지 벌어야 하는 팔자야. 슈퍼 우먼이란 말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더라. 내 신혼의 단꿈은 겨우 일주일은 갔을까? 시댁으로 들어오라는 시부모님의 엄포에 그 잘난 효자께서 우리 엄마가 마련해 준 전세금까지 빼서 들어가자 하드라. 시어머니는 아이 낳으면 키워 줄 것이니 걱정 말라면서 꼬드기더라. 참 우습지? 그 말에 속아 따라 들어간 내가 미친년이지만 시집살이 맵고 짜다는 것은 옛말이라는 것은 말짱 헛소문이야. 요즘은 시어머니가 며느리 시집살이 한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간혹 그런 배짱 좋은 며느리들이 있겠지만 나는 아니더라. 이건 땡 하면 집에 들어가야지. 회식이 있다거나 친구들 모임이 있어 조금 늦을라치면 우리 시엄씨가 뭐라는 줄 아니? 여자가 간뎅이가 부었댄다. 쥐꼬리만한 봉급쟁이 한다고 시에미와 남편을 우습게 안다고 달달볶는 거 있지. 아이가 생기고 나니 더 기고만장이란다. 애보기가 쉬운 줄 아냐면서 당장 그놈의 직장 떼려치우고 들어앉으라는 거야. 내가 누구 좋으라고 그러겠니. 이젠 나도 꼬리 아홉 개 달린 백여우가 다 됐어. 남편 좋은 정도 이 쯤 되고나니 없더라. 미움만 오롯이 남아 마주보면 눈에 쌍심지만 돋는 거 있지. 나도 참 우습다. 좋은 사람 생겨 들떠 있는 너에게 이런 말을 지껄이다니. 미안하다. 석혜야 그래도 여자는 시집을 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 남편 없는 거 보다 있는 게 나을 때도 있으니까. 여자의 울이지 뭐. 나는 네가 평생 독신녀로 살줄 알았다. 노처녀 딱지 뗄 줄 알았으면 진작 내가 중매 섰을 텐데. 숨겨둔 애인이 있으면서 입도 뻥긋하지 않다니 너도 참 의뭉스럽다."

 "미안해. 진작 말해야 했는데. 아직 너만 알고 있어라."

 "알았어. 땡 하면 나가야겠네. 아참, 잊을 뻔 했네. 누가 너 찾아왔더라. 현관 옆에서 기다린대."

 "누구지? 찾아올 사람 없는데."

 나는 사무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퇴근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느린 시계 바늘을 끌어다가 오후 1시에 맞추어 놓고 싶다고 안달하면서, 낯선 손님을 만나려 사무실 현관으로 나갔다. 

 철 늦은 감청색 바바리코트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사무실 앞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 여자. 축 쳐진 어깨위로 손질 안 된 긴 파마머리가 묶여 늘어졌고, 그 머리위에 눈발이 성글게 날아가 앉았다. 그 여자의 뒷모습은 어딘가 혼을 빼 놓고 온 듯 추워보였다. 순간 나는 커다란 쇠뭉치로 강타를 당한 것처럼 아득한 상실감이 세포를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아니 난로불 속에 넣어둔 알밤이 탁 튀어 나오는 소리가 심장에서 났다. 전혀 본적도 없는 여자의 모습이 왜 그리 나를 얼어붙게 했는지. 

 "저어. 아주머니께서 저를 찾으셨다 구요?"

 여인은 뒤돌아서며 나를 얼핏 보는 듯하더니 눈을 내려 감았다.

 "저어 망경 스님 아시지 예?"

 "네에. 그런데요?"

 아마 내일쯤은 사무실 안이 시끄러울 것이다. 여직원들이 모여 앉아 뭐라고 수군댈까. 강 양이 그럴 줄 몰랐다느니, 다시 봐야하겠다느니,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하면서 뭔가 있으니 그 나이가 되도록 시집을 못 갔지. 라며 흥분하고 호기심에 차서 도마 위의 횟감으로 난도질을 하리라. 숙희는 분명, 너 벌 받는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같은 여자끼리. 몰랐다는 말은 설마 아니겠지? 어쩜 그렇게 시치미를 뚝 뗄 수가 있니? 너 진짜 그리 안 봤는데 무섭다 얘. 하면서 비웃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았다. 한꺼번에 밀어닥치기 시작하는 절망을 다 끌어안기엔 내 가슴이 너무 좁고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죄의식은 있었다.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한 인간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타락시켰다는 것, 그 사람의 아픔까지 내가 감싸고 이해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만들었던 순간순간들. 그것이 다 거짓이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나 때문에 그 사람이 괴로워하는 줄 알았다. 발광하듯이 자신을 학대하며 방황하던 그 영혼이 나 때문인 줄 알고 고통스러웠다. 손가락 하나를 잘라가며 계율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사람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이 내겐 너무 컸었다.    

 "석혜 방에 있어? 나 좀 들어가게 해 줄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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