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욤나무에 잔치 벌어졌네.
떼 까치가 몰려왔다. ‘깍 깍 깍 깍 까아깍’ 나뭇가지가 출렁거린다. 널뛰기하는 새떼들,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도 시끄럽다. 여기 먹을 것 많아. 빨리 와. 다른 친구들도 불러. 우리만 먹고 가면 미안하잖아. 와 맛있다. 이건 내 거야. 내가 먼저 찜 했어. 서로 치고받는다. 떼 까치 잔치판 벌어진 우리 집 고욤나무다. 고욤나무는 심은 것도 아니다. 단감 씨가 떨어져 싹이 튼 것일까. 고욤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무심히 북창을 바라봤다. ‘어? 저 나무가 언제 저리 컸지? 무슨 나무지?’ 쥐똥나무 울타리 뒤로 쑥 올라와 하늘을 장식한 것은 고욤나무였다.
경남지역에서 노인들은 고욤나무를 기암나무라고 부른다.
봄이 되면 고욤나무 어린잎을 따서 감잎차를 만들기도 했다. 그때는 내가 손수 가지를 휘어 잎사귀를 딸 정도였지만 지금은 키가 엄청나게 커버렸다. 옆에 있는 상수리나무와 키 재기 내기 중인지. 아무도 관심조차 없었던 자리에 저 혼자 나서 자라는 고욤나무, 자잘한 열매를 주지나 가 지나 달더니 떼 까치의 축제 판이되었다. 그것도 좋은 일이다. 배고픈 날짐승에게 한 끼 맛있는 밥을 대접할 수 있다는 것, 흐뭇한 풍경이다. 덕분에 오전 내내 북창을 열어놓고 떼까지 재잘거리는 소리를 즐겼다.
기암! 하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지리산 자락의 겨울은 야지보다 빨리 오고 추웠다. 우리 집 대나무 밭에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 있었다. 할머니는 고욤이 익으면 일을 삼고 땄었다. 장대로 툭툭 털었다. 고욤을 줍는 수고로움은 나와 동생들 차지였다. 할머니는 그 고욤을 잘 갈무리해서 항아리에 담았다. 신줏단지처럼 안방의 아랫목에 모셨다. 날이 갈수록 말랑말랑 해지는 고욤은 들며 나며 동생과 나의 간식거리가 됐다. 떫은맛이 강할 때는 입안이 묵직했다. 폭 익어갈수록 달콤하고 약간 신맛도 났다. 주전부리용으로 그만이었다. 그 시절 주전부리라 해 봤자 고구마, 감자, 알밤, 홍시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아랫목에 둔 고욤이 푹 익으면 대나무 소쿠리에 부어 걸렀다. 죽처럼 걸쭉하고 달콤한 맛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욤 조청 같은 것이었다. 그 고욤을 항아리에 담아 장독간이나 마루 위 선반에 올려놓았지만 항아리 뚜껑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귀한 손님 대접을 할 때나 예쁜 짓을 하는 손자손녀를 위해 특별상으로 주어졌다. 고욤조청과 떡은 찰떡 궁합니다. 시월 중순과 십일월 초가 되면 어느 가문이나 시제를 지냈다. 동네 어른은 어른대로 대접을 받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대접을 받았다. 시제 지내는 날이면 아이들은 떼로 몰려 묏등까지 따라갔다. 시제 지낸 뒤 나누어 주는 떡과 과일, 전, 고기 등, 한 소쿠리씩 받았다.
할머니는 시제 때 아이들이 얻어온 떡과 이 집 저 집에서 갖다 준 떡을 먹기 좋게 잘라 바짝 말려 숨겨두셨다. 그 떡이 빛을 보는 긴긴 겨울밤. 희미한 등잔불 앞에서 엄마는 길쌈을 하고, 할머니는 해진 아이들 옷과 버선을 깁고 나는 동화책을 읽었다. 뱃속이 출출해질 때면 할머니는 무쇠 화롯가에 바짝 마른 떡 몇 조각을 놓았다. 고소한 냄새가 풍기면 잠들었던 동생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요놈들 냄새는 기똥차게 아는 기라. 배 고푸모 잠도 안 오제. 요기하고 자거라. 밤에 많이 묵는 것도 속에 안 좋다.’ 할머니는 고욤 조청과 떡을 접시에 담아 주셨다. 간에 기별도 안 갈 것 같지만 조청에 떡을 찍어 먹고 찬물 한 사발 마시면 배가 불렀다.
그 고욤이 가지가 휘게 달려도 나는 고욤을 딸 생각조차 않는다. 고욤 조청 만들 생각도 안 했다. 마트에 가면 쌀 조청, 고구마조청, 물엿 등, 식성대로 고를 수 있는 세상이다.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드는 수고로움도 팔팔할 때 이야기다. 고욤 만이겠나. 고구마 조청도 있다. 어릴 때 우리 집은 고구마 농사를 많이 지었다. 자잘한 고구마는 잘 갈무리했다가 가마솥에 푹 고아 고구마 조청을 만들어 놓고 먹곤 했다. 집안 살림을 할머님이 관장하셨으니 나는 엄마 손맛보다 할머니 손맛에 익숙한 유년을 보냈다. 할머니의 손맛은 일품이었다. 그 손맛을 따라한 적은 없지만 내 손맛을 아낌없이 썼던 시절도 있었다. 두 어른 끼니 챙기고 놉을 쓸 일이 많았던 이삼 년 전까지.
이제 모든 삶이 느긋해졌다. 음식 만든다고 부산 떨고 싶지도 않다. 설탕이나 조미료 없이 살던 시절 먹던 음식, 옛 맛이 좋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간소한 한 끼를 먹고자 한다. 재료 본연의 맛에 길든,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좋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은 서구적 밥상이지만 나의 밥상은 한국인의 소박한 밥상이 아닐까. 요리하지 않는 밥상을 권했던 헬렌 니어링에게 찬사를 보낸다. 나도 조리가 필요하지 않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싶다. 문제는 나도 농부도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끔은 육 고기를 먹어줘야 포만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도 내 죽음을 내 의지에 의해 선택하고 싶다. 스스로 음식 조절을 해서 죽음에 이른 스콧 니어링처럼. 부모를 선택할 때 내 의지대로 선택한 것이라면 죽음 역시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고욤나무가 비어 간다. 떼 까치들도 배가 불렀나 보다 소란을 몽땅 피우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욤나무는 열매도 나뭇잎도 거의 털리고 앙상한 가지로 서 있다.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