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을 바라보며
창에 빗방울이 구른다. 빨랫줄에도 빗방울이 매달렸다. 밤 내내 비를 뿌린 아침, 비도 지쳤나 보다. 사방에 빗방울을 달고 고요하다. 빗방울이 내 눈물방울 같다. 맑고 작은 수정구슬 같다. 손가락으로 살짝 튕긴다. 빗방울은 전신주에 앉은 참새 떼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안개가 산집을 폭 감싸버린 날, 둥근 왕거미 집에도 빗방울이 달렸다. 왜 빗방울이 눈물방울 같을까. 눈물이라는 낱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린다. 눈물을 흘려본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사람은 화가 나도 감격해도 고통스럽고 슬플 때도 눈물이 난다. 눈물은 마음의 정화라고 한다. 그동안 나는 마음을 정화시킬 일이 그렇게 없었나. 어쩌면 무덤덤하고 무감각하게 일상을 살아냈기 때문은 아닐까.
친정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시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다.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흘리고 싶지도 않았다. 감정이 격해져야 눈물이 난다고 하는데 큰일을 겪을수록 감정이 고요하게 가라앉아버리니 눈물이 날 리 없다. 오히려 평소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나를 보기도 했다. 친정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울고불고하는 언니를 보며 어째서 저리 눈물을 흘릴까. 진짜 엄마아버지를 떠나보낸 것이 슬퍼서 그럴까. 화장장에서 엄마의 관이 불 속에 들어가고 불꽃이 일어날 때 약속한 것처럼 통곡을 터뜨리던 사람들, 나는 그냥 바라만 봤다. 시부모님은 생장을 했기에 잠자듯이 관 속에 누워계신 모습만 뵈었다. 잘 가시라고, 고생하셨다고, 이젠 아픈 곳 없이 편안하실 것이라고 중얼거렸을 뿐이다.
새삼스럽게 내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을 찾아본다. 결혼하고 대성통곡한 기억 몇 개 있다. 내가 선택한 삶이 고달파서 울었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딸 때문에 울었던 기억이다. 그때 왜 그렇게 울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아마도 내 설움에 취해 울었을 것이다. 친정아버지 꽃상여 뒤를 따르며 섧게 울던 올케의 울음소리가 아직 귀에 머문다. 올케는 왜 그렇게 서러웠을까. 삼베상복에 짚신 신고 지팡이 짚고 가파른 산길 오르기가 힘들어서 그렇게 울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고아이고 하는 곡이 아니라 엉 엉 어 어 헝하고 울었다. 뒤 따르던 내 발걸음은 자꾸 쳐졌고, 나중에는 젤 꼴찌로 혼자 걸어 올라갔었다. 아버지의 묏자리를 잡은 선산이 참 멀게 느껴졌던 그때, 나는 저기 어디 송이가 났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눈물은 마음을 정화시켜주기도 한다. 그때, 대성통곡을 한 후에 속이 후련해졌던 기억이 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었다. 이제 그런 울음을 쏟아낼 일도 없지 않을까. 달관한 사람처럼 ‘그럴 수도 있지. 이것 또한 지나가겠지. 다 지나고 나면 헛것이야. 괜찮아. 이 보다 더 힘들 때도 살았는데. 이까짓 것 별 건가.’ 그래서일까. 울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그때처럼 내 설움에 겨워 목 놓아 울어봤으면 좋겠다. 산이 높아야 골도 깊고, 골이 깊어야 물도 많다고 하던가. 높은 산, 깊은 골도 내 마음속에 있겠지. 너른 평원도 사막도 내 마음속에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