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견례를 생각하며
흐린 날은 마음까지 흐려진다. 우울 모드로 접어드는 마음을 다 잡는다. 우울 모드를 그냥 두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기운 내야지. 중얼거려도 기운이 나지 않는다. 아들이 결혼을 한단다. 관혼상제는 한국인의 뼛속에 깊이 박혀있다. 관혼상제는 관례, 혼례, 상례, 제례, 네 가지 의식으로 한국인의 일생에서 중요한 통과의례를 말한다. 그중에 결혼을 앞두고 있는 아들과 예비 며느리의 부모를 만나는 상견례가 코앞에 닥쳤다. 상견례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양가 가족이 공식적으로 만나 인사하고 혼인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라고 알고 있다.
옛날에는 결혼을 인륜지대사로 봤기에 격식과 형식이 많았다. 결혼 절차 중 하나가 상견례 자리다. 상견례는 결혼 당사자보다 양쪽 부모끼리 의견교환을 하는 자리라고 할 수도 있다. 현대는 부모의 의견보다 자식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라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견례 날짜와 자리도 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잡았다. ‘너희들이 편한 데로 해라.’ 일임을 했지만 마음이 되다. 젊은 애들이 머리가 터지는 것은 아닌지. 일생에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때 어떻게 결혼식을 했었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난 언니가 다 준비해 줬으니 따라만 댕겼던 거 같아. 막상 아들이 결혼한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 결혼비용은 얼마나 들까? 둘이 결혼자금을 모았다지만 그걸로 될까?
당신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저거가 알아서 한다니까.
지금 생각하니 결혼이 참 번거롭고 귀찮은 절차 같은데 우린 어떻게 해 냈지? 그냥 중국처럼 시청이나 군청에 가서 혼인신고 하고 같이 사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아? 결혼비용 절약해서 모았다가 집 사면 되겠네. 우리가 집 사줄 형편도 안 되고, 결혼자금 대줄 형편도 아니니. 가난한 부모를 둔 아들도 많이 답답하겠다. 아들 결혼식에 우리는 뭐 입고 가지? 한복 한 벌 맞춰야 하나?
나는 한복 있잖아. 두루마기도 있잖아. 그거 입지 뭐.
우리 결혼할 때에 맞춘 한복? 버렸는데.
그걸 왜 버려?
내 맘이지. 사십 년이나 된 한복을 그냥 두는 여자가 어디 있어?
사실은 고이 모셔 놨지만 아들 결혼에는 안 입을 거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누가 더 골통 보수인지 아닌지 따지며 티격태격했다.
부모는 자식이 결혼적령기가 되면 조바심을 낸다. 부모는 자식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독립을 해야 안심이 된다. 시아버님 대만 해도 중매쟁이가 다리 역할을 했다. 처녀총각은 맞선을 봤다. 맞선은 사랑보다 서로의 가치관이나 가정형편이 우선되지 않았을까. 신기한 것은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한 부부가 백년해로하는 경우가 많다는 통계였다. 지금도 맞선을 보고 결혼을 하는 부부가 있지만 내가 연애결혼을 한 탓에 남매에게 맞선을 주선하지도 않았다. ‘결혼을 하던 안 하든 너희들 인생이다. 알아서 살아라.’ 방임을 했었다.
남매가 서른 중반을 넘어서자 슬슬 걱정이 됐다. 사귀는 사람은 있다는데 결혼을 할 건가 말건가. 남매는 ‘우리 인생이니 우리가 알아서 해요. 걱정 마세요. 결혼하고 싶어지면 할 거예요. 결혼 안 하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당당하게 말한다. ‘결혼 늦게 하면 애들이 늦잖아. 내 나이에 손자손녀가 고등학생이다. 나도 늦게 결혼해서 너희들이 늦은데. 너희들은 더 늦었잖아. 결혼할 거면 빨리해야지.’ 하면 ‘결혼해도 애는 안 낳을 건데요. 엄마처럼 애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요.’ 똑 부러진다. 잘 키웠는가. 잘 자란 건가. 모르겠다.
아무튼 상견례 자리는 마련됐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톺아보면 한 고비 넘기면 또 한 고비가 기다린다. 그 고비들을 넘기다 보면 죽음을 바라볼 나이가 된다. 사람살이 별 건가.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게 인생이지. 스타가 되는 사람도 타고 난 운대로 사는 거고, 나처럼 촌부로 평생을 살아도 운대로 사는 거다. ‘어디 가서 농사짓는다는 말 하지 마라.’ 농부가 나무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소. 농사꾼 아낙으로 40년을 살았는데 농사꾼 아니면 뭐겠소.’ 대꾸를 하지만 씁쓸하다. 그럼 나는 작가인가. 작가로 불리고 싶은가. 작가로 불릴 때도 있지만 옳은 농사꾼도 옳은 작가도 아닌 어정잡이로 늙어가는 나를 본다. 우리 애들 역시 평범한 일생을 살다가지 않을까.
그러나 평범함 속에 삶의 진리가 있다. 나만의 자리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 어찌 평범하기만 할까. 나만의 가치는 남이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정짓는 것이다. 내가 잘 산다고 생각하면 잘 사는 거다.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한 거다. 남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 없이 나만의 것에 만족하며 산다면 나는 잘 살아왔고 잘 살아가는 것일 게다.
구름이 걷히자 환한 햇살이 비친다. 서둘러 빨래를 널고, 붉은 고추를 넌다. 오이 몇 개 따고, 방울토마토와 가지 몇 개 딴다. 내 손으로 거두는 것들에 대한 애정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우울 모드를 햇살에 펴 말린다. 뽀송뽀송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