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텃밭에서 날리고
근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내 속에 찬 화였다. 아니 작가로서의 자괴감이었다. 00작가 제00호 동인지가 발행된 후 벌어진 일이었다. 지인의 전화로 알았다. 지면에서 사라진 내 소설로 인해 전화들이 오갔다. 동인지를 받지도 못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턱이 없던 나는 분노했었다. 내가 우울해하자 딸이 묻는다.
엄마, 힘들어?
아니, 내 탓이지 뭐. 00작가 회 모임에 나간지도 오래됐잖아. 원고와 회비만 냈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네. 작가회도 이젠 낯설어. 내가 유명 작가도 아니니 자기들 맘대로 한 거지. 나는 무명이라 자연스럽게 뒷방으로 밀린 거지. 신입회원들도 많이 들어온 것 같더라. 그 회원들과 너나들이 할 일도 없었으니 날 챙겨줄 사람이 있겠어. 어떤 모임이든 자주 만나 실없는 농담이라도 건네야 정이 삭지 않는 거지. 사람 정이란 그런 것 같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지. 00작가회도 슬슬 접어야지.
그럼 앞으로 엄마 작품 발표할 지면이 줄잖아.
괜찮아. 내게 글쓰기는 삶이잖아. 원고 청탁 오면 보내면 되고 내 홈에 걸면 돼.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출근을 했다.
텃밭의 고추가 빨갛게 익었다. 고추를 땄다. 고추를 물에 씻어 그늘에 널고 검은 그물망을 씌웠다. 이삼일 시들 킨 후에 널어야 희나리가 지지 않는다. 앵앵거리는 하루살이와 모기가 못 살게 굴지만 대순가. 붉은 고추를 자급자족할 정도만 거둘 수 있길 바란다. 지난해도 건 고추 8근을 거두고 만족했었다. 올해도 끝물고추까지 말리면 열 근 정도는 되겠다. 김장도 조금만 하고 음식도 고춧가루를 적게 쓰는 덕인지 김장철까지 양념할 정도의 고춧가루가 남았다. 초반에 살짝 탄저병이 비치는 것 같아 걱정했지만 저절로 치유가 됐다 고춧대도 고추도 탐스럽게 잘 익어가는 중이다. 고추 담은 박스를 들고 고추밭골을 나왔다. 옷은 흠뻑 젖었고 하루살이와 모기에게 피 보시도 했지만 내 마음을 짓누르던 우울은 가셨다.
뭐. 사는 게 별건가. 동인지 일도 내게 온 탄저병인지 몰라. 남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한다고 내가 울적할 필요 없지. 그냥 자기 글을 싣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 보시했다 생각하면 내가 편한 거지. 마침 다른 지면에서 소설 원고 청탁도 받았으니 전화위복이지. 동인지에서 빼버린 작품을 다시 퇴고할 수 있어 좋고 소설 숙제 하나 해결할 수 있게 돼 더 좋고.
나는 며칠 전에 따서 시들 킨 고추의 꼭지를 딴 후 비닐하우스 안에 널고 오이덩굴을 살폈다. 주저리주저리 열리던 오이도 자라는 속도가 느려졌다. 거름발이 한풀 꺾였나보다. 애썼다. 나는 오이줄기에게 속삭인다. 아직은 이삼일에 서너 개는 딸 수 있으니 우리 식구 먹기엔 충분하다. 다만 나누어주던 것을 못하게 된 것은 아쉽다. 농사 안 짓는 사람에게 오이 댓 개 갖다 줘도 엄청 좋아한다. 시장에서 산 오이랑 맛도 다르고 무르지 않고 아삭 하단다. 내가 선물한 오이는 당일 날 딴 것이라 몇 손을 거쳐 좌판에 나오는 오이랑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누어주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 재미를 거둬야 할 때가 됐다.
오이 대신 왕성한 것은 방울토마토와 굵은 토마토다. 나는 토마토를 안 좋아한다. 과일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육식성이다. 토마토를 잘라 올리브유에 덖다가 달걀을 풀고 매운 고추 썰어 넣어 볶아 반찬으로 해 먹거나 양이 많을 때는 주스를 만들어 놓고 음료수 대신 마신다.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복에 불앞에 서는 일은 서늘한 아침에 해 치워야 한다. 토마토 주스 만드는 일도 고추 따는 일도. 삐질, 삐질 나는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으며 오늘도 엄청 덥겠다고 중얼거리며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윤 유월 덕에 늦더위도 기승을 부릴 것 같지만 어쩌겠나. 환경에 적응해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인 걸.
올 여름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이 여름 언제 가나.’ 중얼거릴 때가 많다. 앞으로 더 뜨겁고 폭우도 심하고, 태풍도 여러 차례 올 것이라는데.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사람 살기 좋다는 우리나라가 열대야로 허덕인 것도 몇 년 전부터다. 냉방기 없이 여름나기를 했던 것이 겨우 이삼 년 전인데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진다. 냉방기 없이 어찌 살았지? 그땐 고사리 농사, 단감농사, 논밭농사까지 농사도 벅차게 지었는데. 과거를 반추할 수 있어 사람살이라 하는가. 신기하게 올해는 가지가 많이 안 연다. 가지 한 포기 심어도 먹고 남아돌았는데 두 포기 심었는데도 가지가 귀하다. 귀하기에 더 맛난 것인지.
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힘들다.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살고자 한다. 잠깐 만나 시시덕거리는 것이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마음을 주면 그만큼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라 마음 주기를 겁낸다. 00작가 회도 오랜 인연이라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 들고 몸이 안 따라주면서 다른 문학 동아리는 다 접었지만 유일하게 00작가 회와 한국작가 회에만 적을 두었다. 나머지는 인터넷 세상보기를 한다. 물론 내 소설이나 시, 수필이 뛰어나지도 않아 독자의 사랑을 못 받지만 글쓰기는 꾸준히 하고 있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다. 글 중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빼어난 문장가는 못 되지만 내 일상을 깁고 다듬고 바라보는 것에는 진솔하다.
나는 오이 세 개, 가지 한 개, 매운 고추 서너 개를 챙겨 집안으로 들어오며 중얼거린다.
내게 온 탄저병을 잡는 것도 나잖아. 더 좋은 소설을 쓰라는 뜻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