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쿠폰 덕에
아들도 오고, 예비 사위도 왔다. 아들과 사위는 오자마자 농부에게 힘을 보탠다. 시댁 정리하는 것을 돕는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시댁으로 향하는 농부를 배웅하며 옛날 사람들이 왜 아들 타령을 했는지 이해할 것 같다. 힘쓰는 일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낫다. 77년을 해로하고 가신 두 어른이 남긴 집에는 치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다. 1톤 트럭 몇 대분을 실어내도 아직 실어내야 할 잡동사니가 많다.
시부모님이 평생을 모우고 썼던 물건들이다. 구석구석 쟁인 허섭스레기들 꺼내도, 꺼내도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비우고 또 비워도 비울 게 나온다. ‘이건 골동품인데, 이건 새 것 같은데. 이건 쓸데가 있을 것 같은데.’ 분리해 놨다가 다시 트럭에 실어버린다. 내가 쓰는 물건들도 차고 넘치는데 더 보태고 싶지 않다. 아까워도 그냥 버리라 한다. 요즘은 청소업체를 불러 처리한다지만 경비가 만만찮다고 들었다. 농부랑 남매가 직접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는 데도 돈 타작이다. 집 다듬는 것도 돈 타작이다.
그러나 사람 손은 무섭다. 농부 혼자 하다 아들과 사위, 딸이 거드니 집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이 보인다. 내가 시집 온 후 재래식 옛집을 기둥만 남기고 정지까지 털어 방 넓히고, 싱크대 놓고, 목욕탕에 양변기 놓고, 세탁기 놓고, 새시 문 달았던 집을 다시 손보고 있다. 낡은 싱크대를 뜯어내고 새로 놓았다. 가전제품도 새로 사들이고 목욕탕과 화장실을 다시 고치고 집안 벽지 새로 도배하고 장판 새로 깔고 바깥벽에 수성 페인트를 칠하니 새집 같다. 안온하고 좋다. 두 어른과 정들었던 집이라 그런지 편안하고 좋다.
아직 집 안팎 정리정돈이 남았고, 창고와 텃밭과 마당손질도 해야 한다. 일은 농부가 하고 나는 구경만 한다. 농부는 내가 거치적거린다고 옆에도 못 오게 한다. 고초당초 매운 시집살이와 거리가 먼 며느리로 살아왔다. 시부모님 사랑도 듬뿍 받았다. 삼이웃 빤한 농촌살림에 남매 낳아 키우면서 힘들어 허덕여도 두 어른 그늘이라 견뎠지 싶다. 미운 정 고운 정이라 했지만 미운 정은 없고 고운 정만 남았다. 저승에 계신 두 어른께서 도와주시는 것 같다. 집안 일이 잘 풀리고 있다. ‘고생 많았다. 애썼다.’ 다독여주시는 것 같다. 농부도 남매도 어미를 온실 속 화초마냥 돌봐주니 아니 고마우랴.
나는 새로 단장한 방에 들어 시아버님이 베든 목침을 베고 누웠다. 예전에 시아버님께서 외출하시고 나면 시어머님 곁에 누워 재잘거리다 잠이 들곤 했다. 내가 잠이 들면 얇은 이불을 꺼내 덮어주셨던 어머님, 그 손길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어머님이 많이 도와주시는 것 같다. 부잣집 고명딸로 환생하셔서 사랑 듬뿍 받으며 호의호식 하시라고 빌어드리는데. 아직 환생하지 않으셨을까. 어머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 같다. ‘언제 철이 들꼬. 나~는 오데로 무씨고.’하시면서 나를 품어주셨던 어머님이 그립다.
기분이다. 오늘 저녁은 내가 쏜다. 쇠고기 샤브샤브로 포식하자.
모두 고생한 주말 저녁이다. 바라지도 않았던 공돈 같은 민생회복쿠폰도 받았겠다. 한우 전문점을 가냐 마냐 하다가 집에서 먹기로 했다. 아들과 시장을 봐왔다. 육회용 쇠고기와 샤브샤브용 쇠고기를 넉넉하게 샀다. 소주 맥주도 박스째 샀다. 냉방기 빵빵하게 털어놓고 거실에 판을 벌였다. 솜씨꾼 아들은 육회를 만들어 내고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린 육수가 끓자 온갖 야채와 쇠고기가 목욕을 하고 나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맥주와 소주병이 즐비하게 늘어나는 저녁, 산속 집은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빵빵 터졌다.
고물가시댁에 내게 할당된 민생쿠폰 20만 원은 우리 집 거실에서 바닥을 쳤지만 비싼 한우고기 포식하게 해주니 어찌 아니 고마우랴. 벌써부터 두 번째 민생쿠폰이 기다려진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욕심이 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