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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고단한 인생

by 박래여

고단한 인생

박래여


빗소리를 듣는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졌다가 우르르 쾅쾅 장대비가 쏟아지다 뚝 그친다. 북소리 장단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쏟아졌다 그쳤다 반복한다. 간밤에도 그랬다. 비 소리에 깼다가 조용해지면 잠에 빠졌다가 또 깼다. 나도 모르게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반쯤 가사상태에 빠져 꿈과 현실을 오갔다. 골짜기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 돌이 구르는 소리,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소리들로 가득 찬 어두운 밤이었다.


손 전화에 오는 안내 문자는 밤낮을 안 가리고 쏟아진다. 침수지역이나 예상지역은 대피하라는 방송도 이어진다. 산사태 걱정 없이 살던 나도 산사태가 걱정된다. 가파른 산 중턱에 굴착기가 길을 닦은 이후부터다. 골짜기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에 사람들이 산에 드는 것을 꺼린다. 우리 집 위쪽으로 잘 지은 집은 이웃이지만 누가 사는지 모른다.


우리가 터 잡을 때 이웃한 그곳은 옛날 공동묘지였다. 몇 년 지나자 젊은 스님이 땅을 사서 고르고 절을 지었다. 돌탑을 쌓고 부처님 기도처가 되더니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부잣집 별장으로 바뀌었는지 현관에 관리인까지 두더니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지금은 무슨 연수원으로 이름을 달았다.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지만 가끔 인기척을 느끼긴 한다. 가까이 살아도 폐쇄된 장소, 도둑으로 몰릴까 봐 기웃거리는 것조차 못한다. 궁금증은 있어도 해결방법은 없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도 침해다.


한 자리에 30년이 넘게 살면 알게 모르게 자연에도 변화가 온다. 산의 지형이 조금씩 바뀐 것 같을 때가 있다. 물론 나무와 풀이 자라고 새 수종이 자리 잡으니 숲이 달라져서 그럴 수도 있다. 폭우나 태풍이 지나가면 천지가 흔들린다. 자연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골짜기 지형이 달라지고, 산길이 달라지고, 숲이 달라지는 것, 사람은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다. ‘어, 저기 저 나무가 언제 저렇게 컸지?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어? 저기 있던 야생화는 어디 갔지?’ 어느 날 깨닫는다.


자연은 나고 자라고 죽는 것을 순리라고 한다. 자연은 순리를 따라 살다 간다. 인간만 악착스레 삶을 부여잡으려고 한다. 인간은 참 이기적이다. 폭우가 쏟아지면 비가 많이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고, 가뭄이 심하면 가뭄이 심하다고 하늘을 원망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도 공짜를 간절히 바란다. 몸은 편하고 싶고, 돈은 풍족하길 원하니 사기가 판을 친다.


농부는 잠결에 전화를 받다가 <카드발급 보이스 피싱>에 당할 뻔했다.

우체국 택배기산 데요. 00이시죠? 주소가 00번지고요?

그런데요?

00 은행에 신청한 카드가 도착했어요. 본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00 은행에 카드 신청한 적 없는데요.

주민번호가 어떻게 돼요?


농부는 얼결에 주민번호 앞자리를 알려줬다. 택배기사라는 사람이 카드발급의 진위를 확인하려면 00 은행으로 전화를 해 보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농부는 택배기사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00 은행이라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묻는다. 그때 ‘나는 카드를 신청한 적이 없는데 카드가 발급됐다는데 어쩌고 저쩌고’하는 농부의 목소리가 컴퓨터 앞에 앉는 내게 들렸다. 나는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여보, 그거 카드사기야. 경찰서에 연락해. 나도 그런 전화받은 적 있어.

여자가 내 목소리를 들었나 보다. 상냥하게 전화를 받던 여자가 말한다.

우리 은행에서는 고객님의 명의로 카드를 발급한 적 없습니다.

여자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농부는 부랴부랴 농협부터 달려갔다. 기존 통장 외에 새로 통장을 개설할 수 없게 조치를 해 놓고 왔다. 자칫 방심하다간 당한다. 그들은 택배기사라면서 개인정보를 줄줄 외우며 교묘하게 질문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화를 걸도록 유도하니 순진한 사람들은 당하기 쉽다. 간 땜했다. 빠져나갈 돈도 없지만 사기꾼이 판을 치는 세상 같아서 겁난다. 머리회전이 느린 노인이 사기꾼의 타깃이 되기 쉬우니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


요즘은 나라에서 주는 ‘민생회복 쿠폰 신청’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니. 그 좋은 머리를 생산적인 일에 쓰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선한 뒤끝은 있어도 악한 뒤끝은 없다’는 속담의 진리를 믿는다. 사기를 치는 사람은 자연의 순리에 거스르는 사람들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 역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다.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는 쪽박 차는 결과가 빠르지 않을까. 인간은 이승의 삶이 저승의 삶이 되고, 저승의 삶이 이승의 삶이 되는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쁜 짓을 하다 죽으면 환생한들 똑같은 삶을 선택받을 것이니 삶이 아니 고단하랴. 복을 짓고 살아도 모자라는 짧은 인생인데 왜 업을 짓고 사는지. 고단한 인생이다.


농부가 잠결에 당할 뻔했던 보이스 피싱이 판을 치는 세상, 믿음보다 불신의 벽이 두터운 세상,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간도 빼 가겠다.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를 바라본다. 저 빗줄기가 세상의 추하고 더러운 마음까지 깨끗이 씻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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