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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국민 청원을 넣어볼까

by 박래여

국민청원을 넣어볼까.



근 한 달여 폭염에 시달렸던 나뭇잎에 생기가 돈다. 비 갠 뒷날의 숲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와 풀이 해맑다. 새들의 지저귐도 밝고 활기차다. 살아있는 것들에게 물은 생명수다. 생명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자연의 강력한 힘이 담겼다는 5가지 물질, 5대 원소 즉, 물과 바람, 흙과 불, 마음이라고 했다. 그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가. 가늠할 수 없다. 모두 중요하지만 나는 물이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되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기 즉 바람이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없다.


나는 30년이 넘도록 산골짜기 물을 끌어다 쓰면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가뭄이 길어지면 골짜기 물이 말라 식수 부족 현상이 오면 물을 아꼈다. 아무리 삼복더위라도 빨래며 목욕조차 맘대로 할 수 없었다. 들통을 들고 골짜기를 오가며 식수를 받아 써야 했다. 갑자기 폭우가 내려 벌물이 터지면 골짜기 지형이 바뀌기도 했다. 골짝에서 물을 끌어오는 호스가 떠내려가면 벌물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연결해야 했고, 싯누런 황톳물을 정화시켜 사용해야 했기에 물에 대해 민감하다.


한 자리에 붙박이로 살아도 사람은 나잇살을 뺄 수 없다. 한 해가 다르게 보태지는 나잇살에 청년이 중년이 되고, 중년이 노년이 된다. 젊을 때는 아무리 힘든 노동도 해결할 수 있다. 골짜기 물 때문에 벌어지는 일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거꾸로 가는 길에 선 노년이 되자 힘에 부쳤다. 물론 100년 만의 가뭄 운운할 적에 물 부족 현상을 겪으면서 지하수도 팠었다. 그때 우리 고장은 지하수가 풍부하지 않은 지형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또한 지하수는 불소가 많은 유황천이라는 것을 알았다. 식수로 불합격을 받았지만 허드렛물로는 가능했다. 비누로 머리를 감아도 매끈매끈한 물이었다. 아쉬우면 샘 판다던가. 그 지하수를 받아서 유황냄새가 빠지면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다.


몇 년 전, 관청에서 동네의 간이상수도를 없애고 집집마다 상수도 설치를 하게 되었다. 우리도 당연히 상수도 시설 신청을 했다. 우리 집 앞을 통과해 고개를 넘어가는 상수도 공사를 할 때만 해도 믿었다. 개인 집으로 들어오는 수도관을 설치해 주기로 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식수 관설치 선을 표시할 때만 해도 믿었다. 당연히 상수도가 들어올 줄 알았다. 오랫동안 도로를 파내 상수도 공사를 했다. 집을 오가기도 불편하고 기계음이 내는 소음에 시달리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다. 상수도가 들어오면 물 때문에 고생 안 해도 되겠다 싶어 참았다.


그러나 상수도 공사가 완공되고 동네는 집집마다 수도가 설치됐지만 우리 집과 집 아래위로 띄엄띄엄 떨어진 단독주택 대여섯 가구는 혜택을 받지 못했다. 개인 집으로 들어오는 상수도관을 매설하지 않은 것이다. 상수도 공사를 맡은 업체가 일부러 뺀 것인지, 관청 담당자가 빼라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수도는 산기슭에 자리 잡은 단독주택 대여섯 집을 무시하고 고개를 넘어 다른 동네로 연결되었다.


그제야 우리는 뒷북치는 신세가 됐다. 무시골 아저씨와 농부는 관청의 상수도과를 들락거리며 당신네 잘못이니 바로 잡아 달라. 상수도를 넣어 달라고 민원을 제기했다. 예산이 없어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애초에 작성되었던 사업계획에는 우리 집을 비롯해 다섯 집으로 들어가는 상수도관이 매설되도록 되어 있었다. 왜 그 계획이 변경됐는지 따졌다. 관공서 담당자는 자기네 잘못 없다고 발뺌을 했다. 무시골 아저씨와 농부는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다녔다. 딸 역시 담당관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직 희소식을 듣지 못했다. 나중에는 추경예산이 없어서 안 된다며 추경예산이 잡히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했다. 어디다 하소연해야 먹혀들까. 청와대에『국민청원』을 넣어볼까. 젊어서는 골짜기 물을 식수로 사용하면서 겪는 우여곡절에도 잘 대처할 수 있어 걱정도 안 했는데 노인이 되니 식수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구온난화는 가속화된단다. 폭우로 골짜기가 범람할 수도 있고, 가뭄으로 물이 고갈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30여 년 전, 염소 방목을 위해 산속으로 들어오면서 골짜기의 물 수량부터 확인했었다. 물이 있어야 사람도 염소도 살 수 있으니까. 물이 없으면 사람은 살지 못한다. 내가 늙어 노인이 되었다고 삼십 년이 넘게 살아온 터전을 바꾸기도 어렵다. 우리 부부가 떠나면 자식이든 타인이든 누군가 또 내 자리로 들어와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물 부족현상으로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 농부는 오늘도 관공서를 찾아갔다.


예산을 편성해서 원래대로 상수도관을 묻어 달라. 개인 집으로 들어오는 상수도관을 매설하지 않은 것은 당신들 책임이다. 왜 고개를 넘어가는 관을 묻으면서 개인 가정집에 들어갈 자리가 확보되었는데 상수도관을 매설하지 않았나. 당신들이 잘못해 놓고 개인이 희생하라니 당신 같으면 그렇게 하겠느냐. 예산이 없으면 예산을 편성해서 주민이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관청의 의무 아니냐. 따지고 있다.


온갖 추측을 해 본다. 관청 담당자와 공사 측에 검은돈이나 불법 거래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태한 공무원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공사 업체가 공사비를 줄이려고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닐까. 상수도 과의 담당자나 공사를 했던 업체에서 몰랐다는 변명은 통할 수 없다.


올해도 마른장마가 계속되더니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물 부족 현상이 오면 유황천이라도 끌어올려 허드레용으로 사용하고 동네에 내려가 식수를 길어 와야 할지 모르겠다. 지구가 몸살을 앓는다. 병든 지구는 스스로 병을 치유하려고 자연을 이용한다. 텍사스에 유래 없이 쏟아진 집중폭우와 일본 열도를 흔들고 있는 지진만 봐도 지구의 미래가 보인다. 지구가 용트림을 하고 있다. 거드름을 피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어서 하는 용트림이다.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중산층과 하층민이다.


다행히 식수 걱정을 하던 차 단비가 왔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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