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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그 길이 보여서 나는 슬프다

by 박래여

그 길이 보여서 나는 슬프다.



무엇을 먹어야 집 나간 입맛이 돌아올까.

한여름, 폭염은 계속되고 날은 가물다. 밤에 빨갛게 뜬 달을 봤다. ‘내일도 찌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도시의 반 지하에 사는 사람들, 선풍기로 여름 나기를 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루를 견딜까. 외국인 노동자가 더위를 마시고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대의 나라에서 왔다는 노동자도 한국의 여름날씨에 목숨을 잃었다니. 돈 욕심에 폭염을 겁내지 않고 땡볕에서 무리하게 노동을 해서 그럴 게다.


이슬이 안 깬 텃밭에 들어섰다. 오이와 풋고추 몇 개 따고, 상추 잎 한 주먹 따고, 동이 오르기 시작한 쑥갓과 마당가의 민들레 여린 잎 몇 개 땄다. 방울토마토도 가지도 수시로 딴다. 오늘은 민들레 잎과 상추, 쑥갓, 오이를 섞어 새콤달콤하게 무쳐야겠다. 쌉싸래한 맛이 입맛을 돌아오게 하지 않을까. 민들레가 간 해독에 최고라는데. 밥 먹기 싫은데도 끼니를 건너뛰지 못하는 것도 습관이겠지.


폭염이라 그런가. 시어른 생각을 자주 한다. ‘기운 없다. 무엇을 먹어야 집 나간 기운이 돌아오겠나. 몸보신할 거 좀 해 봐라.’ 생삼을 우유와 갈아 장복하셨고, 한약방 단골이셨고, 건강식, 보양식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으셨지만 몸에 살점이라곤 없었던 시어른이셨다. 한여름에는 잘 먹어야 한다며 민물장어나 사골 곰을 하라 지시하시고, 개다리를 사다 고아드려야 했던 어른이셨다. 그때는 ‘보양식을 저리 드시는데 왜 기운이 없다 하실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도 노인 대열에 들어서니 이해가 된다. 아무리 잘 먹어도 기운이 달린다. 폭염이 계속되자 딸과 농부의 영양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딸은 걷거나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 농부는 아침저녁으로 감산을 오간다. 부녀가 땀으로 목욕을 하고 온다. 더위를 이기려면 단백질 보충은 필수다. 가장 손쉬운 단백질은 계란과 콩물이다. 계란 한 판을 삶아 버섯과 통마늘, 매운 고추를 넣어 장조림을 만들어 놓고, 콩을 삶고 봄에 사다 놨던 땅콩을 볶아 섞어서 믹스기에 갈았다. 콩물은 소금을 넣어 짭짜래하게 만들어 놓아야 며칠 먹을 수 있다. 콩물에 국수를 말아먹어도 좋고, 출출할 때 한 컵씩 마셔도 속이 든든하다. 콩물이 짜면 정수기 물을 부어 간을 맞추면 된다. 오이와 양파도 채 썰어 놓고 고명으로 쓴다.


텃밭의 오이는 이삼일 간격으로 따내도 계속 열리는 여름 효자식품이다. 수시로 양배추와 양파와 매운 고추를 섞어 오이 물김치를 만든다. 예전에는 오이로 물김치를 담근다는 생각도 못했다. 여름 내내 열무물김치가 밥상에서 떨어지면 불효 령이 났던 시어른께서 오이 물김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시어머님은 여름 내내 고추밭 가에 열무 씨를 뿌리셨다. 열무가 적당히 자라면 거두어서 물김치를 담그는 것은 내 몫이었다. 열무 물김치가 떨어지기 전에 또 담가야 하니 여름철 김치 담그는 것이 고역이었다. 물김치 만이겠나. 고추가 붉게 익어갈 때는 붉은 고추 몇 개 따고 마늘, 양파, 생강에 밥 한 숟가락 넣어 믹스기에 곱게 갈아 자작한 열무김치를 담갔다. 사과나 배를 넣어도 시원하다.


그런데 두 어른 가시고 나도 노인이 되자 게으름이 자꾸 나를 잡는다. 텃밭의 열무가 벌레집이 되는데도 거두기가 싫다. 아직 열무김치 담근 것도 남았고, 오이물김치를 계속 담그니 열무로 물김치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야야, 머 하노? 국물짐치가 떨어져 간다. 열무 빼다 놨다. 와서 짐치 담가라.’ 시어머님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시어머님은 지척에 불러 일을 시킬 며느리가 있어 얼마나 편하셨을까. 나는 아직 부를 며느리도 없다. 며느리가 생겨도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고초당초 매운 시집살이를 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집살이시킨다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거꾸로 란다. 며느리 시집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는가.


농부는 반찬 만든다고 싱크대 앞에서 종종걸음 치는 나를 보며 혀를 찬다.

그런 거 하지 마라. 김치랑 풋고추랑 된장만 있어도 된다.

나는 그렇게 먹어도 되는데 당신은 안 돼. 단백질 보충은 필수야.


그렇다. 농부는 시어른 체질이다. 잘 먹어도 살이 안 찐다. 물론 입도 짧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해 놔도 당신 입맛에 안 맞으면 젓가락질도 안 한다. 시아버님처럼 ‘맛이 있니 없니, 이게 음식이라고 내놨나. 간이 하나도 안 맞다.’ 음식까탈은 부리지 않지만 나는 농부의 눈치를 본다. 시집온 이래 사십여 년 나도 모르게 무의식에 박힌 눈치 아닐까. 새 반찬에만 젓가락질을 하던 시부모님, 매끼마다 어떤 반찬을 해 드리나 고민했던 흔적이다. 입맛 까다로운 어른들 시중들기 힘들다는 푸념에 손윗동서나 손아랫동서는 ‘동서가 길들였으니 동서가 책임져야지.’하던 말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사이 보리를 데리고 새벽 산책을 나갔던 딸도 돌아왔다.

와, 맛있겠다.

딸아, 오늘은 도시락 싸지 마라. 점심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날마다 도시락을 싸다니는 딸을 두고 농부랑 나가서 외식하기가 미안해 집 밥만 먹었더니 식상하다. 물론 외식을 안 하니 돈이야 굳지만 대신 내가 부지런을 떨게 된다. 딸 도시락 반찬 때문이다. 딸은 아무거나 싸 가면 된다지만 어미 마음은 그렇지 않다. 시원할 때 반찬이나 찌개를 끓여 놓으면 딸은 식탁을 차리고 도시락을 싼다. 농부가 가장 좋아한다. 딸 덕에 요것, 조것 식상하지 않게 새 반찬을 대령이니 오죽 좋으랴. ‘밥 하기 싫어. 반찬 만들기 싫어. 나가서 먹자.’ 타령을 하던 아내 대신 기꺼이 밥상을 차려주는 딸이 있으니 아니 좋으랴. ‘딸 먹이는 것은 하나도 안 아깝지?’ 시샘도 한다.


나는 엄마 밥이 최고로 맛있는데. 엄마가 집 밥 먹기 싫구나.

덥잖아. 점심 차리기 싫어서 그래. 점심시간 맞추어 사무실로 갈게.


그렇게 점심을 밖에서 해결했다. 보리밥집에서 비빔밥을 먹었는데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음식이라 뭐든지 맛있다. 조미료가 덜 들어가는 음식점이다. 맛소금은 살짝 가미된 것 같다. 그 정도면 양호하다. 점심 잘 먹고 나와서 딸은 말했다.


9천 원이나 주고 보리밥을 사 먹는 것보다. 엄마 반찬에 비벼 먹는 밥이 더 맛있어. 저 보리밥을 나는 두 끼 거푸 먹기 힘들겠다. 나는 엄마 반찬이 젤로 맛있어.

나는 네가 만든 반찬이 더 맛난 걸.

주말에 엄마 먹고 싶은 거 해 줄게.

고맙다. 저녁에는 콩국 해 놓을 게.


딸의 칭찬은 연일 계속되는 폭염에 떨어진 입맛도 돌아오게 만든다. 비록 엄마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딸의 빈말이라도 듣기 좋다. 자식에겐 한없이 약한 것이 어미다. 모정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 하든가. 나는 또 요것조것 딸이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고 딸이 먹고 싶다는 과일도 살 것이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은 아까워도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 모정이라 했다. 문제는 내가 못 해 줄 때가 올 것이라는 거다. 딸이 해 주는 밥상을 받아야 할 때가 멀지 않았다는 거다. 그 길이 보여서 나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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