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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냉장고 소동

by 박래여

냉장고 소동



시댁에서 가져온 냉장고를 청소하다 울었다. 방치했던 냉장고 속은 더러웠다. 얼룩진 것들을 꺼내 주방세재를 푼물에 담가 수세미로 씻었다. 물걸레질을 하고 햇볕에 말리는 사이 나는 눈물로 세수를 했다. 강직하고 가부장적이던 시어른 밑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던 시어머님을 생각했다. ‘난 엄니처럼 안 살아.’ 나도 한 성질 한다. 덕분에 시아버님 대물림인 농부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불통 부부.


결혼하고 몇 개월을 주말부부 할 때다. 어느 주말에 집에 오니 어머님이 우리 방 아궁이에 군불을 때며 울고 계셨다. 숨죽인 울음이었다. 그때는 시아버님의 독재를 잘 모르던 때였다. 또한 시아버님은 내게 엄청 자상하셨으니. 아궁이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계신 시어머님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무엇이 저리 서러우실까. 얼마나 힘드시면 저리 우실까. ‘니가 집에 들어와 밥만 해 조도 내가 좀 살것다.’ 그 말씀을 주말마다 들었다. ‘그래, 어차피 결혼은 했고, 직장에 다니기도 싫은데 사표내자.’ 내 발등에 도끼 찍는 줄을 몰랐다.


시댁에 들어와 시집살이를 하면서 집안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어보게 되었다. 집안의 대들보는 맏자식이라는 시아버님, 여름 철 내내 모시 한복을 입고 죽부인을 품고 주무셨던 시아버님, 붓글을 쓰고 분재를 가꾸고, 오토바이를 타고 친구들과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유람을 즐겼던 시아버님이셨다. 시어머님은 머슴이었고, 도시 생활 접고 들어온 차남 역시 당신 맘대로 부리는 애기머슴 같았다. 대신 시어머님의 아들 사랑은 지극했다. 농부 역시 시어머님의 보조가 없으면 농사짓기 힘들었다. 손발이 척척 맞는 모자 사이에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나는 펜대 굴리며 살던 콧대 높은 여자였으니까. 집안 살림만 해도 오감치.


그러나 농부는 오랜 세월 부모 곁에서 무의식적으로 보고 배우고 익힌 것이 습이 되었다. 시어머님의 고집에 시아버님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옹이가 되어 깊게 박힌 줄 몰랐던 것이다. 농부는 여자는 시어머님처럼 남편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시댁에서는 여자가 남자 앞에 나서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 망한다는 망습(亡謵, 망할 습관)이 골수에 박혀있는. 농부는 ‘내가 왜? 당신이 해.’ 맞대놓고 거부하는 아내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노.’ 그랬다. 우리 부부는 서로 고정관념을 통째로 바꿔치기 하지 않는 한 불통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한여름에 삼계탕을 하라는 시아버님의 지시가 떨어졌다. 이웃에서 토종닭 한 마리를 구해오신 시어머님은 나보고 그 닭을 잡으라고 하셨다. ‘엄니, 저는 못해요. 이런 건 애비한테 시켜야지요. 왜 엄니가 해요?’ 평생 당신이 했던 일이다. ‘야가요. 이런 걸 남자가 우찌 하노?’하셨다. ‘친정에서는 우리 아버지가 다 해 주세요.’ 나이만 먹었지 눈치코치도 없는 며느리의 대꾸에 시어머님은 혀를 차셨다. 자연히 우리 부부도 마찰이 심했다. 뒤돌아보면 어찌 살았나 싶다. 아마도 시어머님이 아들 덕에 살았듯이 나도 남매 덕에 살았지 싶지만 어쩌면 농부식의 사랑방법을 알았기에 살아냈는지 싶다.


지금은 모난 모서리가 많이 닳았지만 여전히 우리 부부는 불통이다. 냉장고를 집으로 가져온 농부의 마음은 단순할지 모른다. 일꾼 쓸 일도 없는데 큰 냉장고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우리 집 냉장고가 오래 되어 고장 나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참고로 우리 집 냉장고는 삼성에서 나온 지펠 냉장고다. 구입한지 20년도 넘었다. 이미 단종 된 냉장고지만 아직 잘 쓰고 있다. 두 어른이 쓰던 것은 우리 집 냉장고보다 한참 뒤에 구입한 것이다. 냉장고 벽에서 시아버님의 글을 발견했다. ‘계사년 8월 1일 구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봤자 13년이나 된 헌 냉장고다. 시댁을 정리하면서 누군가 시댁에 들어와 살게 되면 쓰겠다 싶어 놔뒀던 것이다.


한바탕 성질을 부렸다. ‘쓰던 물건도 버려야 할 나이에 왜 자꾸 물건을 들이냐. 물건이 자꾸 쌓이는 것이 싫은데. 시댁에서 쓰던 것들 자꾸 가져오는 것도 싫고 집에 물건이 쟁이는 것도 싫어. 제발 버려, 우리 집에도 다 있어. 버리라고. 그 물건들이 그렇게 아까우면 아예 집을 한 채 더 짓든가. 당신이 그 집에 들어가 살든가.’ 농부도 맞받아쳤다. ‘냉장고를 도끼로 탕탕 부셔버리겠다’고 ‘그래, 그러셔. 덕분에 나는 몇 백만 원짜리 새 냉장고 월부로 구입할 거니까 더 좋고.’ 한바탕 하고 생각하니 시댁냉장고도 쓸 날이 올 것 같다. 지금 쓰는 냉장고가 고장 나면 바꿔치기 하면 되겠지. 내가 더 늙으면 냉장고도 텅텅 비워두게 되지 않을까. 가정용 냉장고가 좁으면 저장고 이용하면 된다.


그런데 단감저장고 사용 때문에 겪은 진통도 만만찮다. 지금은 저장고를 큰 칸과 작은 칸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큰 칸은 단감전용이지만 작은 칸은 자자부리 한 식품 저장고도 겸했다. 이태 전까지 농부는 단감 판매가 끝나면 저장고의 전기를 차단해버렸다. 겨우내 마늘이며 양파며, 김치며, 저장고에 들었던 것을 꺼내 정리하려니 힘에 부쳤다. 농사용 전기는 한 달 사용료가 2만 원 전후다. 전기세 내가 부담할 테니 작은 칸만 돌리자고 사정했다. 억지로 허락을 받았지만 전기세 고지서만 받으면 내 속을 뒤집기 일쑤였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내 삶의 자리가 산골이라 가게도 멀고 시장도 멀다.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식재료나 생활용품을 항상 여분으로 챙겨놔야 한다. 왜냐면 예고도 없이 밥상을 차려야 할 때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제 때 조금만 해서 싹 먹어치워야지.’ 말처럼 쉽지 않다. 반찬 한 가지에 몇 번의 손이 가야하고, 몇 가지 재료가 섞여야 하는지. 요리를 해 본 적도 없는 남자가 따따부따하면 여자의 속은 뒤집힌다. 모르면 주는 대로 먹어야 양반이지. 잔소리는 왜 하는 것일까. 라면 하나 끓이는데도 몇 가지 재료가 들어가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데. 가정주부에게 큰 냉장고나 저장고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게 전기세 때문에 인색하게 굴던 농부도 딸이 귀향을 하자 따따부따 하지 않는다. 냉장고 도는 소리나 저장고 도는 소리가 성가셔서 잠을 못 잔다는 말도 안 한다. 둘이 살 때보다 전기세가 두 배로 나오는데도. 역시 부부 사이에 자식은 매개자다. 요즘 들어 다리 부실한 내게 저장고도 멀게 느껴진다. ‘딸아, 저장고에 가서 그것 좀 가져와라.’ 농부에게 부탁하긴 어려워도 딸에게 부탁하는 것은 편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저장고에 든 식재료 꺼내는 것도 힘에 부칠 날이 올 것이다. 다리가 부실해지면 걷는 것이 힘들다. 뭐든지 편리하게 손닿는 곳에 있어야 쓰기 편하다.


사실 시댁 냉장고는 내가 두 집 살림 할 때 산거다. 내 손때가 묻은 냉장고다. 나는 시아버님과 시어머님 사이에서 다리역할에 기쁨조 역할까지 했었다. 두 집 살림에 내 몸이 망가졌지만 늘 괜찮다고 했었다. ‘젊은 기 와 그리 아푸노?’ 하실 때, ‘너거가 옆에 사니 당연히 우리를 봉양해야지’하실 때, 저녁 차려드리고 아침 상차림을 해 놓고 와도 다음 날 아침이면 ‘야야, 너거 시어매가 아파서 몬 일어 나것단다. 와서 밥상차려라.’ 호출하셨던 시아버님, 그 덕에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었던 나는 심장병을 얻었고 시어머님은 노인우울증을 앓으셨다.


그래도 나는 평생 고부갈등을 겪은 적은 없다. 시아버님께 쥐어 사셨던 시어머님에 대한 연민 덕이었을까. 그 시어머님 돌아가신지 이태밖에 안 됐지만 나는 수시로 시어머님의 삶의 고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시아버님과 말투와 행동까지 판박이 같은 농부 때문에 남편 앞에서 말문을 닫았던 시어머님을 이해하고도 남게 된다. 나도 말을 아낀다. 시어머님과 다른 점은 남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거다. 잘 참다가도 한번 씩 폭발한다. 막가 파란다. 그래야 가슴에 쌓인 응어리도 풀리고 집안질서도 유지된다.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택한 나니까. 인간답게 희로애락을 누리는 거지. 울다가 웃는다.


딸의 문자를 읽었다. 성질주머니가 펑 터져버렸다.


제목: 설득과 합의, 그리고 협치의 부재에 관하여


어머니가 뿔났다

땀 뻘뻘 흘리고 퇴근한 딸에게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묻는다

할매 집에 냉장고는 와 샀노

멀쩡한 냉장고를 와 바꾸노

꼭 고생을 사서 한다

너거 아빠는

옳타구니

현관문 앞에 위풍당당 서 있는 냉장고

할매 집에서 우리 집까지 날아왔나 했더니

역시나 목슈가 요술을 부렸구나.

일이 눈에 들어오니 일단 해버렸나

혼자 오래 생각하고 고민해서

안주인에게 말하는 걸 까먹었나

까먹을 게 따로 있지 설득을 까먹나

아이고 아부지 아무리 배고파도

안주인 설득을 까먹으면 우얍니꺼.

혼자 오래 고민하고 통보하는 심보

아무래도 울 아부지한테서 유전되었나 보다.

그래도 엄니

영문 모르는 딸에게 역정은 너무 하지 않소

아무리 남편이 밉기로서니 딸에게 화풀이 하면 딸 맘이 아프잖소 힝.

여씨 집안 먹을 게 없어

남정네들 설득과 합의와 협치를 삶아 드셨나

무덤에 누운 할배 할매

며느리 속 썩는 소리

시아버지 욕하는 소리

시어머니 마음 십분 공감하는 소리에

귀가 간질간질 하시것다.

나라고 다르지 않아 부끄럽지만

그래도 한 소리 해야것소.

아부지 실행하기 전에 제발

안주인 설득 좀 시켜주소

안 될 것 같으면 뇌물이라도 먹이소

그래야 합의도 하고 협치도 할 것 아입니꺼.

어머니 화내기 전에 제발

왜 짜증나는지 설명 좀 해 주소

아니면 화가 났다고 먼저 말이라도 해 주소

그래야 하나밖에 없는 딸 마음에 준비라도 할 것 아니오

아무리 아부지 꼴 보기 싫다지만

어쩌겠소

이게 인간 몸 받은 삶이라 엄니가 말씀하지 않으셨소.

우리 재명 씨처럼

말하고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같이 살아 봅시다.

권아 명심하여라

네가 여기 없어 내가 참 아쉽다

이 재미난 광경을 나만 목격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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