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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엄니가 그립다.

by 박래여

엄니가 그립다.


장마철은 눅눅하다. 어제는 흐렸고, 오늘은 쾌청하다. 이불빨래를 했다. 여름 이불을 폈으면 싶으나 밤낮 기온차가 심하다. 산중턱 골짜기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해만 떨어지면 창문을 닫아야 할 만큼 춥다. 흐린 날은 군불을 때고 잔다. 몸이 늙어서 그런지. 날씨가 변죽을 울려 그런지 잘 모르겠다. 방바닥에 냉기 안 올라올 정도로 군불을 땐다.


나는 자주 시부모님의 생활방식을 떠올린다. 내 나이 대에 두 분은 어땠는지. 나보다 훨씬 건강하시고 젊었던 것 같다. 시아버님은 늘 아프다는 말씀을 달고 사셨지만 시어머님은 지금의 농부처럼 건강하셨던 것 같다. 나 역시 팔팔할 때였다. 그때는 그때대로 힘들고 고단했을 것이다. 어우렁더우렁 살아갔지만 농사꾼 아낙으로 주저앉고 싶지 않다는 내면의 울부짖음에 힘들지 않았나 싶다. 현실에 침식당해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서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글을 쓰고 책을 읽었던 것도 나를 잃기 싫어서가 아니었을까.


책 보모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호메이 들고나가서 밭을 매고 오든가.

시집살이 틈새에도 책과 볼펜을 끼운 노트를 챙겨 다녔다. 새참 먹고 쉬는 시간에도 책을 읽고 글을 썼던 나를 못마땅해하셨던 시어머님도 나중에는 ‘너 때문에 내가 산다.’고 할 정도로 내게 의지하셨다. 시어머님과 달리 시아버님은 책 읽고 글 쓰는 며느리를 기특해하셨다. 시아버님도 학구적이셨다. 열심히 붓글도 쓰셨고, 분재도 키우셨고, 신문과 신동아 잡지를 구독하셨다. 한마디로 시아버님은 시골 한량이셨다. 친구 집에 가시면 일부러 내 글이 실린 농민신문을 보여주며 며느리 자랑을 하셨다는 일화도 전해 들었다.


아요, 00에미야, 지금도 글 쓰나? 요새는 신문에 안 실리던데.

팔십이 다 된 동네 할머니의 물음에 난감할 때도 있었다.


오래전에 작가란 공인 자격증을 땄지만 우리 동네에서 나는 여전히 옛날에는 염소 집 아지매, 중간에는 고사리 집 아지매, 지금은 단감 집 아지매로 통한다. 시인이나 소설가, 수필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는 촌로가 몇이나 될까. 농촌에 시집와서 촌부 생활에 길들어 살다가 저승길 떠나는 사람들, 팔구십 대 노인 중에는 글자 모르는 분도 있다. 글자를 몰라도 기막히게 덧셈뺄셈에 능숙했다.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보다 더 경이로웠다.


현재 졸수를 바라보거나 졸수를 지나도록 살아온 노인들 이야기를 기록한다면 장편 소설 한 권으로는 부족하다. 대하소설을 쓰고도 남을 것 같다. 나는 늘 내 필력이 모자라는 것이 부끄럽다. 감칠맛 나게 진솔하게, 소설이란 허구를 빌러 촌로의 인생살이를 기록하고 싶지만 여전히 다 풀어낼 수 없어 안타깝다. 농촌사람의 삶을 뭉뚱그려 주인공을 내세워 재생시켜 보지만 만족할 수 없다. 모자라는 구석이 많다.


나는 누구나 자신이 처한 자리에 젖어 사는 것도 잘 사는 인생이라고 본다. ‘이게 아닌데,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닌데.’ 생각하면 삶이 고통스러워진다. ‘그래,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내 몫만큼 살고 있으니 만족해.’ 그렇게 생각하면 타인이 어떤 평가를 하던지 내 속은 편하다. 나를 중심에 두면 가족도 타인이 될 수 있다. 내 뱃속에서 나와 세상 보기 한 자식도 성장한 후에는 개인이다.


내 소설을 읽은 아낙이 물었다. ‘작가님 이야기죠?’ 나는 싱긋 웃음으로 답했다. 작가인 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독자는 ‘심리묘사가 뛰어나요.’ 하기도 했다. 또 어떤 독자는 자기 어머니 이야기 같다고도 했다. 농촌에서 농사짓고 사는 촌부니 내가 쓴 소설의 주인공도 작가 자신인 줄 알지만 작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소설로 읽어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여자로서 심중에 꽂힌 말을 쉽게 뱉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겉 다르고 속 다르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을 포장하는 법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본능 아닐까. 나는 내 글에서 주인공이 내면의 자신을 직시하는 것을 보고 싶다.


오전 내내 세탁기를 네 번 돌렸다. 이불 네 채를 빨았다는 뜻이다. 햇살을 몽땅 나 혼자 차지한 것 같아서 기분 좋다. 물론 이층 계단을 오르내렸으니 운동이 심하긴 했지만 농부가 거들어줘서 수월했다.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다. ‘엄마, 오늘 두 채 빨고, 내일 두 채 빠세요. 또 무리하지 말고.’ 딸은 어미단속을 하고 출근을 했다. ‘알았다.’ 대답은 잘했지만 아까운 햇살을 그냥 놀릴 수야 없지. 덕분에 뽀송뽀송한 이불 덮고 꿀잠 들겠다.


점심밥이 없다. 나가서 먹을까. 어제도 밀면 먹고 왔는데. 외식을 자주 하는 것도 미안타. 빵과 커피로 때울까? ‘여보, 밥이 없는데 점심은 뭘 먹지? 빵으로 때워도 될까?’ 화선지에 붓글을 쓰던 농부는 ‘당신 맘대로 하소.’ 답이 흔쾌하다. 그래, 내 맘대로 하지 뭐. 빵과 커피, 상추와 쑥갓, 풋고추, 된장, 오이, 양파, 텃밭에서 건진 것들을 주르륵 나열했다.


밥이 없는 밥상을 차려놓고 시부모님을 생각했다. 시부모님이 칠십 대였든가. 밥 하기 싫다는 시어머님 때문에 아침 한 끼는 빵으로 때워야겠다고 하셨던 시아버님, 빵집에서 맛있는 빵과 우유, 요구르트를 잔뜩 사다 드렸지만 사흘을 못 넘겼다. 빵은 간식밖에 안 된다고 삼시세끼 밥을 먹어야겠다고 하셨다. 아침 한 끼는 죽을 드시라고 녹두죽, 깨죽, 전복죽 등, 죽을 한 냄비 끓여다 드리기도 했었다. 죽을 먹으니 기운이 없어 안 되겠다고 하셨다. 결국 귀결점은 삼시세끼 밥과 국이 있어야 했다. ‘에고, 또 무슨 국을 끼리노.’ 시어머님의 푸념이 내 푸념이 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어른 돌아가신 후 국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던 나를 알고 있는 농부는 ‘국 없어도 된다. 국끼리지 마라.’ 했다. 『밥 따로 물 따로』이상문 저자의 책도 읽었다. 국과 밥을 따로 먹어야 건강에 좋다는데. 여전히 나는 국이 없는 밥상을 차리면 농부의 눈치가 보인다. 어떤 때가 내가 따끈한 국물이 그리워 국을 끓인다. 오랫동안 길들어 온 습관을 버리기가 이리 어려운가. 삼식이 영감과 사니 나도 삼식이 할멈이 되었다.


저녁에는 김밥과 떡볶이를 했다. 어머님이 계시면 참 좋아하셨을 것이다.

니는 뚝딱뚝딱 맹글어도 맛이 있다. 손맛이 있는 사람이 있니라.

저승 가신 엄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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