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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퇴수기를 애도함

by 박래여

퇴수기를 애도함



장마가 시작된다는 날 온종일 비가 왔다. 저녁이 되자 빗방울도 굵어졌다. 모두 잠들어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는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거실의 불을 껐다. 방음이 잘 되는 집안이지만 빗소리는 우렁찼다. 어둠속에 오뚝이처럼 앉아 빗소리를 들은 적이 언제였든가. 귀만 열어놓고 빗소리에 취하기엔 늙었지만 이따금 소녀 적 감상에 젓는다. 어둠속을 더듬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요란한 빗소리가 리듬을 탄다. 클래식행진곡 같다.


어둠속에서 귀만 열어놓고 빗소리 감상을 하려면 앉을 자리가 필요했다. 거실 탁자를 가늠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탁자에 걸터앉을 생각이었다. 탁자 모서리가 만져졌다. 조심스럽게 궁둥이를 뒤로 쭉 빼 살그머니 앉았다. ‘앗 차거! 뭐지?’ 발딱 일어섰다. 뭔가 탁하고 갈라졌고, 차가운 것이 내 궁둥이를 적셨다. 순간, ‘퇴수기?’ 탁자에 놓인 퇴수기였다. 퇴수기는 퇴숙우, 퇴수구라고도 부른다. 저녁에 황차를 마시며 쓴 퇴수기가 하필이면 탁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비 탓에 비울 수가 없어 거기 둔 것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금세 발바닥에 흥건한 물이 느껴졌다. 전기 스위치가 있는 벽은 멀었다. 매끌매끌한 나무 바닥에 물이 넘치니 자칫 미끄러질 수도 있었다. 탁자를 빙 둘러 놓인 방석이 다 젖겠다. 물이 어느 쪽으로 쏟아졌는지를 가늠하며 방석을 안 쪽으로 던지고 살살 기어서 벽에 붙은 전기스위치 눌렀다. 환하게 불이 들어오자 퇴수기에 담겼던 물이 쏟아진 자리에 찻잎도 같이 뒹굴고 있었다. 발 닦는 수건을 가져와 거실바닥의 물부터 처리했다. 한밤중에 낑낑거리며 마룻바닥을 닦는 늙수그레한 아낙이라니.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퇴수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호, 통재라 너와의 인연이 끝났구나.”


나는 퇴수기의 깨어진 부분과 남은 부분을 바라보며 거칠게 쏟아지는 빗소리도 잊었다. 신나던 행진곡이 뚝 끊어진 줄도 모를 정도로 퇴수기와 나의 인연을 생각했다. 삼천포 시골마을에서 도공으로 시인으로 사시는 달묵 님의 작품이다. 이십 몇 년 전 <나무그늘>이란 전통찻집을 개업했었다. 차와 수제비, 농사지은 우리 밀을 방앗간에서 빻아 수제비를 끓였었다. 우리 밀농사를 포기한 뒤에는 한 살림에서 우리 밀을 구입해서 사용했었다. 그때 다기 세트와 수제비 그릇을 몽땅 달묵 님께 부탁드렸고, 흔쾌히 싸안고 오셨었다. 결국 찻집 운영에 실패하고 문을 닫았지만 퇴수기는 여태 나와 함께 동고동락 해 왔었다.


그때 진돗개 사랑이 유별나셨던 달묵 님은 새하얀 진돗개 꽃순이도 선물로 주셨다. 꽃순이는 하얀 여우처럼 생겼었다. 꽃순이는 한동안 내 속을 태웠다. 달묵 님을 찾아 간다고 가출을 하는 바람에 찾아다니느라 애를 먹었었다. 꽃순이가 자굴산 꼭대기기에 올라가 우는 바람에 등산객들 혼을 쏙 빼기도 했었다. 결국은 꽃순이도 나를 인정하고 마음을 열어줬었다. 영리하고 순종적이었던 꽃순이는 새끼를 낳아 3대를 이어 집 지킴이가 되어 주었고, 마지막 손은 백구였다. 목사리도 없이 키우던 백구, 늙고 병든 백구를 살려보려고 무던이도 애썼던 나날들, 죽을 자리를 찾아갔다가도 내 부름소리에 기어오다시피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백구, ‘고생했다.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네가 원하던 삶을 살아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쏟았던 눈물이 빗소리를 따라 들려오는 것 같다.


“퇴수기 자네, 오랫동안 고마웠네. 털 팔이 내 손에서 여태까지 남아 준 것만도 고맙네. 이제 우리 인연이 다했으니 미련 없이 가시게나.”


나는 깨어진 퇴수기를 쓰다듬으며 사람에게 하듯이 말을 걸었다. 애착이 묻은 질그릇이라 그런지 자꾸 안타깝고 애틋하다. 달묵 선생께 연락해서 퇴수기를 구입해야 하나 어쩌나 머릿속을 굴리다 반짝 불이 켜졌다. 사랑방에 남은 퇴수기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다.


그제야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있었다. 흥건하게 젖은 바짓가랑이와 창밖에서 쏟아지는 거친 빗소리였다. 빗소리를 듣겠다고 불을 껐다가 오랜 지기였던 퇴수기만 떠나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오호 통재라. 내 손을 거쳐 간 것들 중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던가. 생명 없는 물건도 사람의 애착이 붙으면 생명의 불이 켜진다. 그 불은 내가 켰으니 내가 꺼야 하는 것인 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불이 꺼지면 당황하는 것도 사람이다. 퇴수기에 잡혀있는 동안 놓쳐버린 빗소리는 다시 내 마음의 여운을 불러다주지 못한다.


달묵 님은 어떻게 나잇살을 두르고 계실까. 여전히 도자기를 굽고 계실까. 한 때 가마에 불을 붙일 때 농부가 거든 적도 있는데. 백 살이 넘은 할머니를 모시며 시를 짓고, 도자기를 구웠었지. 투박하고 묵직한 질그릇의 온기가 느껴진다. 달묵 님이 만든 다기세트에 담겼던 차와 막사발에 담겼던 우리밀수제비. 그 다기세트도 막사발도 아직 사용하고 있는데. 남은 퇴수기도 선생의 작품이다. 너나들이 할 때의 호방한 웃음소리가 그립다. 지금도 여전하시겠지. 언제 날 잡아 뵈러 가야겠다. 생각이 많아지면 잠자기가 어려워진다. 탁 접고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퇴숙우- 퇴수기, 퇴수구라고도 함. 차를 마시고 남은 차 찌꺼기와 찻잔 씻은 물을 버리는 다구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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