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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원

<단편소설 2>

by 박래여

......새파란 의사는 더위를 마셨거나 소화불량 같다고 했다. 요즘 더위 마신 환자가 줄을 잇는다고 했다. 연휴라 응급실에 있어봤자 소용없다며 집으로 돌아가라 했다. 그는 주사 맞고 약 처방받고 돌아왔다. 추석인데 기온은 영상35도를 오르내린다. 에어컨 없는 집은 어찌 사나 걱정할 정도다. 아들은 이참에 종합검사를 하자고 했다. 위내시경검사와 복부시티 검사도 포함된다. 그는 ‘소화불량이라잖아. 더위 마신 것은 나락 잎에 앉은 아침 이슬 받아 마시모 낫는다. 촌에서는 그렇게 했다. 낼 아침에는 들에 가서 이슬을 거다 마시 볼란다.’ 싹둑 잘랐다. 나는 ‘당신 소화 안 된다고 한 지가 언제요. 이참에 검사나 해 봅시다. 그래야 유럽 여행도 가지.’ 살살 달랬다. 아들은 가을에 우리 부부의 유럽 여행 일정이 잡혀 있단다.


그는 못 이기는 척 허락했다. 복통으로 실려 갔던 집 근처의 종합병원에서 검사를 했다.

유럽여행이란 미끼가 그를 살린 것인지. 죽이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며칠 후, 검사 결과를 보러 갔다. 중년의 내과의사는 환자의 몸에 큰 이상은 없고 복부 CT 검사 결과가 조금 나쁘다는 말을 했다. 다른 병원에 가보고 싶으면 의사소견서를 떼 주겠다고 했다. 그는 ‘소화가 안 돼서 그렇지 괜찮습니다. 소화제 며칠 먹으면 나을 겁니다. 평소 소화불량을 자주 겪습니다. 좀 쉬면 괜찮을 겁니다. 약이나 잘 처방해 주이소.’ 그는 진료실을 나갔다. 뒤따라 나서는 나를 ‘보호자님 잠깐만요.’ 의사가 불러 세웠다. 의사는 아들 전화번호를 물었다. 나는 둘째아들의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나왔다.


그날 저녁에 아들이 집에 들렀다.

“아버지, 의사선생님이 전화를 했데 예. 서울 00병원에 가 보랍니더. 빠를수록 좋다는데. 그 병원의 소화기계통 유명한 의사가 친구랍니다. 복부 정밀검사를 해 보랍니더. 소견서도 써 주데 예. 환자의 병을 잘 찾아낸다고 소문난 의사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뭔가 께름찍한 것이 있지 싶어예. 아부지는 건강하다고 병원 안 댕겼으니 이참에 정밀검사를 해 봅시더. 엄마랑 유럽 여행 가시기 전에 건강 다지는 것이니 밑져야 본전 아닙니꺼.”

“병원비는 공짜가? 저거 돈 벌어 물라꼬 그라제. 성한 사람도 병원 가모 환자가 되는 세상이다. 환자는 너거 옴마다. 골골하는 너거 옴마나 모시고 가 봐라. 나는 소화가 안 돼서 그렇지 다른 데는 이상 없다. 소화불량이 하루 이틀 일이가. 약 무모 낫는다.”

“아버지, 고집은 피울 때 피우시고 이번에는 제 말 좀 들어 주이소.”

“야가, 괜찮다는데도 그러네.”

“의사가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봤자 소용없다고 하데 예. 아버지가 팔십이 넘은 노인이라모 저도 아부지 시키는 대로 할 낍니더. 인자 칠십인데 제 말 좀 들어 주이소.”

“안 간대도 그런다. 일 없다.”

그는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의 고집을 안다. 억지로 될 일이 아니다.


삼십 대에 우리는 고향인 다산마을을 떠나 인근 도시로 이주했다. M시 재래시장에서 좌판장사를 했었다. 시골집과 방앗간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남은 돈으로 시장가의 다세대 주택에 세를 들었다. 난전에서 채소며 과일을 소매로 떼다 팔았다. 재미가 쏠쏠 했다. 몇 년 지나자 산비탈에 신흥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시골 쌀을 찾는 고객이 늘었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인수했다. 고향의 친인척으로부터 촌 쌀을 걷어다 아파트에 팔았다. 그는 주문 받은 쌀 포대를 어깨에 메고 승강기 없는 15층 아파트까지 오르내리면서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이 올매나 많은데. 장사가 잘 되는 것도 다 이웃사촌 덕이다. 촌에서 빈손으로 나와서 이만큼 가게를 키운 것도 주변 사람들이 도와 준 덕이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남 탓하기보다 자기 탓이라고 하는 남자,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남편이지만 그는 내게 상 남자였다.


그에게 한이 있다면 못 다한 공부였다. 그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 어머니를 잃었다.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홀아비가 된 그의 아버지는 재혼을 하기보다 며느리를 들이기로 했다. 방앗간을 운영하던 시아버님은 여자 일손이 시급했던 것이다. 맏아들인 그가 중학생이 되자 서둘러 혼처를 구했다. 하필이면 그 상대가 나였다. 이웃집 할머니가 찾아와 혼담을 넣었다. 방앗간 집 아주머니가 임종 전에 며느리 감으로 나를 찍었단다. 아들보다 연상이라 더 좋다고 했단다. 방앗간 집은 살림이 포실한 알부자로 소문났다. 농촌은 삼이웃 가정사가 손바닥 안이다. 나도 그 집 사정을 알고, 그 집에서도 내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이모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도시에 나가 공순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모는 허락하지 않았다. ‘너거 옴마 죽기 전에 내랑 약조했다. 니를 궁민학교 졸업시켜 데리고 있다가 좋은 혼처자리 찾아 시집보내 주것다고 약조했다. 그라이 오데 나간다는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말거래이.’ 그랬다.

내 고향은 지리산 장당 골이다. 내가 일곱 살 때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건사할 여력이 없었다. 언니 둘은 식모살이를 보냈고, 나는 백리 밖 들녘에 사는 이모 집에 애보기로 보냈던 것이다. 이모는 엄마랑 약속을 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나는 어린조카들을 내 등에 업어 키웠다. 솔직히 나는 이모 집 애보기에다 식모였지만 이모가 엄마 같아서 좋았다.


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이모는 일찌감치 내 혼처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맞선도 몇 번 봤지만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퇴짜를 맞았던 것이다. 살림이 있으나 없으나 번듯한 집안에서는 뭐 볼게 있다고 나를 며느리로 택하겠는가. 남의 집에서 본데도 없이 자랐고 인물도 없는데다 성깔도 드세다는 소문이 났으니. 이모는 마땅한 혼처자리가 나타나지 않아 애를 태우는 눈치였다. 나 역시 불안했다. ‘이러다간 재취나 삼취로 늙은 홀아비한테 시집 가라하면 어쩌지?’ 그러던 차에 하필이면 맞선 상대가 면소재지 유일한 방앗간 집 장남이라니. 그것도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소년이라니.


“아지매, 몸은 좀 우떻습니꺼? 병원에는 댕깁니꺼?”

보리방아를 찧으러 가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건넸었다.

“꼬마처니가 왔구마. 손끝이 참 맵네. 시집가모 잘 살 끼라. 얼굴에 복이 있어.”

아주머니는 나를 딸처럼 살갑게 대해줬다. 눈칫밥 먹고 사는 나를 아는 것 같았다.

전생의 인연이었을까. 매파랑 삽짝에 들어서는 그를 봤다. 나는 정지 문 뒤에 숨었다. 문틈으로 그를 훔쳐봤다. 고동색 양복을 입은 그는 어린 티가 없었다. 훤칠했다.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 틈에 섞여 교복을 입은 그가 학교에 가는 것을 먼발치에서도 봤고 방앗간에서도 봤다. 그는 또래보다 성숙했다. 내 눈에 그는 어린 소년이 아니라 오빠 같았다. ‘저리 겉늙었나?’ 내 볼에 붉은 장미꽃이 피었다.


이모는 그를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이모의 부름을 받고 그와 마주앉았다. 부끄럽고 어색했다. 평소 천방지축에다 선머슴 같다던 나는 어린 소년 앞에서 주눅이 들었다. 그도 내가 싫지 않은 듯 얼굴을 붉혔다. 맞선,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사주단자는 금세 왔고 나는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방앗간 집으로 시집을 갔다.


그렇게 나는 아내가 됐다. 그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학생의 신분이었다. 장가를 든 그를 선생도 친구들도 놀렸다. 그는 학교를 자퇴했다. 이듬해에 아버지가 되었다. 방앗간을 운영해야 했고, 농사도 지어야 했고, 두 동생의 공부 뒷바라지도 해야 하는 처지였다. 나 역시 신혼의 단꿈은 없었다. 시댁으로 들어오자마자 다홍치마는 횃대에서 빛이 바랬고 방앗간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눈사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이모 집에서 일머리를 길렀던 나와 달리 그는 일머리가 없었고 소심하고 여렸다. 고마운 것은 어린 나이었지만 그는 가장의 도리를 알았다. 밤마다 알뜰살뜰 사랑해 주었다. 나는 그 사랑 덕으로 고단한 나날을 살아냈다.


첫아들에 이어 연년생으로 아들을 낳았을 때 국가에서 산아제한 바람이 불었다. 아들 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슬로건이 걸렸다. 그것도 몇 년 못 가 한 명만 낳아 잘 키우자는 슬로건이 걸렸다. 그 슬로건을 비웃듯 내 뱃속에 막내가 들어섰다. 지울 수가 없었다. 또 아들이었다. 세 아들의 아버지가 된 그는 자진해서 보건소를 찾아가 정관수술을 했다.

“옛날부터 어른들 말씀이 며느리보고 손자보모 자슥에게 고방열쇠며 지겟다리 물리 주는 기라 캤다. 인자 너거가 살림 두량해라. 나는 손주들 재롱 봄서 살란다.”


시아버님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우리에게 방앗간을 물러주고 일에서 손 뗐다. 손주들 돌보겠다던 어른이 날이면 날마다 뒷짐 지고 저자거리 주막으로 나돌았다. 집에 들어오면 별 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고 역정을 냈다. 무엇이 그리 불만스러운지 얼굴에 내 천자를 그렸다. 예를 들면 손자를 당신이 안고 자겠다며 데리고 갔다가 우리가 잠자리에 들 즈음이면 ‘아그 데리고 가거라. 잠투정이 심해 내가 잠을 설친다.’했다. 또한 별일도 아닌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밤이 이슥하도록 ‘에미야, 목마르다. 막걸리 한 사발 갖고 온나. 에미야, 출출한데 머 물거 없나? 에미야, 에미야.’ 기타 등등. 우리 부부의 방 앞을 오락가락하며 헛기침하기 일쑤였다. 뒤늦게 알게 됐지만 우리 부부의 금슬이 좋은 만큼 시아버님의 시샘과 질투도 만만찮았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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