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회 회식자리
노인회 점심약속이 있었다.
이번에는 꼭 오소. 쇠괴기 집에서 한다네.
노인회 총무인지 김 씨 할아버진지 모르겠지만 몇 번의 전화가 왔고 농부가 받았다. 나는 귓등으로 들었다. 농부가 가자면 갈 것이고 말이 없으면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이니 처분을 따르기로 했다. 늘 그랬다. 날짜를 잊어버릴 때도 있고, 단체 회식 때마다 가는 오리고기 집은 질려서 싫다거나 하면 ‘그럽시다.’ 간단히 동의해 버린다.
노인회 점심약속 당일 날이었다. 총무 할배가 전화를 했다.
갈 거요?
가자. 12시 20분까지 회관 앞으로 오란다. 승합차가 온단다.
우리도 승합차 탈거요?
우리 차로 가지 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맞추어 회관 앞에 갔더니 승합차는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태우고 떠났다. 개인승용차로 먼저 간 사람들도 있단다. 고기 집으로 출발했다. 회식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너른 주차장에 승용차가 줄을 섰고 관광버스도 있다. 고기 집에 손님이 미어터진다는 뜻이다. 그 집은 맛있는 집으로 소문난 지 오래다. 고 물가 시대에 장사 잘 되는 집은 뭔가 있다. 음식재료를 아끼지 않아 밑반찬이 맛있거나 고기를 많이 준다.
먼저 도착한 동네 노인들을 만났다. 익숙한 얼굴들인데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이다.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르다지만 노인의 길이 그런 것 같다. 지팡이를 짚거나 옆 사람의 팔을 잡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노인들, 느림보 거북이가 아니라 느림보 민달팽이 같다. 봉고차 타고도 멀미를 한다는 할머니는 노랗게 뜬 얼굴로 야외탁자에 엎드려 있다.
할매, 어디 아파요?
멀미가 나서. 자꾸 빠져서 서운했는데 참 잘 왔소.
들어 가입시더.
우리 집 차는 타도 괜찮은데 남의 차만 타모 멀미가 난다. 와 이라꼬.
차를 자주 안 타서 그럴 겁니더.
할머니를 부축해서 실내로 들어갔다. 주방은 주방대로 분주하고, 홀도 방도 손님으로 와글와글 북새통이다. 큰 방을 차지한 우리 동네 노인들 숫자를 세 보니 겨우 20여명 남짓이다. 만날 때마다 참석 인원이 준다. 불판이 있는 탁자 하나에 4사람이 앉았다. 밑반찬이 나오고 등심이 푸짐하게 담긴 쟁반이 탁자마다 놓인다. 고기 굽는 사람은 맛볼 새도 없이 불판의 고기와 버섯, 밑반찬은 사라진다. 등심은 부드럽다. 이가 부실한 노인들 먹기에 딱 좋다. 자식들이나 오면 맛볼 수 있는 귀한 한우다. 총무는 모자라면 더 시키면 된단다. 국가에서 나오는 노인회 회비로 충당하는 것이니 돈 걱정 안하고 양껏 먹어도 된다. 인당 4,5만 원 정도면 푸지다. 한 식탁에 5인분 고기가 금세 사라지고 고기 추가가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불판에 된장국이 끓고 밥이 나왔다. 들깨가루와 쇠고기와 두부가 든 시래기 된장국이 별미다. 밥 한 공기도 뚝딱이다.
아이고 인자 더 못 묵것다. 오랜만에 포식 했더니 뱃속이 요동을 친다.
농담을 건네는 노인들 얼굴에 홍조가 돈다. 점심 값이 백여 만 원 넘게 나왔단다. 노인회 회식 날은 내 호주머니에서 지출하지 않아도 영양보충 할 수 있는 날이니 아니 좋으랴. 우리 동네 노인들 평균수명이 85세가 넘는다. 90이 넘은 노인도 여러 명이다.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거무죽죽해서 저승사자가 모시고 갈 때가 된 것 같던 노인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회식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것만도 건강한 거다.
혼자 사는 노인은 하루 한 끼나 제대로 드실까. 당신 손으로 밥 차려 먹기 싫다. 입맛도 떨어진다. 자식들이 보내주는 반찬이 냉장고에 들어 있어도 밥솥에 밥이 있어도 밥상 차리는 것 자체가 귀찮다. 장기요양 혜택을 받는 노인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차려주는 밥상만 기다린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나이를 산다는 것, 사람의 길이지만 노인의 길은 길수록 쓸쓸하다.
코로나 이전만 해도 노인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 하는 것, 설거지 하는 것 때문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어딜 가나 앉아서 받아먹는 사람 있고, 나대며 차리는 사람 있다. 노인이 되면 잘 삐진다. 몸도 힘들다. ‘나도 하기 싫다. 누가 해 주는 밥 먹고 싶다.’ 밥을 도맡아 하던 좀 젊은 노인도 손을 놓아버리기 일쑤다. 매달 봉급을 주더라도 점심을 책임질 사람을 구하자는 말도 나왔었다. 실행했다. 얼마 못 가 실패했다. 점심 한 끼를 책임져줄 사람도 쉽지 않았다. 평생 부엌을 못 면하고 살아온 할머니는 자신의 밥도 챙겨먹기 싫은데 동네 노인들을 위해 봉사정신을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던 차, 코로나가 터졌고 마을 회관도 문을 닫았다. 코로나 끝 무렵 우리 동네에서 한 해에 저승길 든 노인이 열댓 명일 때도 있었다. 동네주민 수는 해마다 꾸준히 준다. 요양원이나 저승길 떠난 노인 수가 해마다 는다.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노인들 머릿속에 죽음의 두려움을 심은 것 같다. 코로나 대란은 3년 만에 끝났지만 마을회관에 모여 소일하는 노인이 없다. 아직 마스크 착용을 하고 다니는 노인도 흔하다.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이랄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조용히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친구로 삼거나 지팡이에 의지해서라도 줄기차게 걷기 운동을 하는 노인도 있다. 안 걸으면 앉은뱅이 될 것 같아 한 발짝 걷고 쉬고 반복한다는 노인이다.
조석으로 기온차가 커졌다. 가을도 없이 겨울에 돌입한 것 같다. 올 겨울에는 또 몇몇 노인이 북망산으로 떠날 것이다. 이웃에 있은 장례식장을 지나칠 때마다 눈길이 간다. 차들이 많이 있고 화환이 보이면 ‘또 누가 돌아가셨구나.’숙연해진다. 죽음은 차례대로 오지 않는다. 누가 먼저 죽고 누가 뒤에 죽을지 모른다. 어떤 인생이 성공한 인생인지 모른다. 살고 죽는 것은 남의 잣대가 아니라 내 잣대다. 내가 잘 살았다 생각하면 잘 산 인생이다.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의 말처럼 ‘그냥 사는 거다. 오늘을.’ 명언 같다.
담에는 빠지지 말고 오소. 이래 얼굴 보니 좋네.
네, 아지매도 건강 잘 챙기셔야 해요.
그렇게 동네 어른들과 헤어졌지만 집으로 오는 길이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