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도 이건 막장인데요?
끊었던 담배 냄새가 났다.
그는 나를 바라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 못 해."
부정적인 말이 나올 것을 예상했으나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말이 나올 줄이야.
순간 내 주위의 공기가 어디론가 다 빨려 들어간 듯 숨이 잘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나를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바라보았다.
바로 어젯밤, 우리의 추억이 있는 장소에서 빨간 장미꽃과 풍선, 케이크를 준비하고 편지를 줬던 그였다.
세상의 모든 꽃을 나에게 주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나를 꽃으로 파묻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분노와 답답함이 치밀었다. 항상 그는 그랬다. 나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다며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숨기려고 했다.
이 사건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사실 결혼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작은 생채기를 많이 얻었다.
각자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식장을 잡기로 했었는데 자꾸 약속이 미뤄졌다.
몇 번이나 남자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 밀렸었다.
그것도 바로 당일에, 아버님의 사무실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항상 이유는 같았다.
"지금 다른 손님이 와 계신대. 너무 바쁘시대..."
나는 이런 일들을 회피하지 않았다.
나에게 다가올 행복에 이상 시그널이 감지될 때마다 스스로 현명하게 잘 대처했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우리 둘이 먼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서둘러보자."
라며 식장을 먼저 잡았고, 우리 부모님과 인사를 먼저 했고, 웨딩 촬영을 하고 본식 드레스를 골랐다.
유독 행복했던 날들이 많았고 또 불안했던 날들도 많았다.
‘시댁에서 날 마음에 안 들어하는 걸까?’라는 생각은 10분 정도 스쳐갈 뿐이었다.
난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는 법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나를 싫어할 리 없잖아...라고 생각했고, 남자 친구 역시 진짜 아니라며 나를 몇 번을 안심시켰다.
두 분 모두 나를 정말 좋아한다고 우리 아들만 잘하면 된다고 이런 말씀을 부모님이 한다고 했다.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는 아버님 대신 어머님을 따로 뵈었을 때도 나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라며 어머님은 내 눈도 잘 바라보지 못하셨다. 그저 그때는 어머님이 되게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마 어머니의 마음 한편에는 나를 고생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 잡아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문제는 아버님이었다.
자꾸 나를 피하던 남자 친구의 아버지.
사실 남자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긍정적인 표현보다 부정적인 말들을 훨씬 많이 해 왔었다.
자수성가로 이만큼 성공하셨지만 독불장군에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하려고 하신다고. 심지어 몸이 안 좋은 상태인 걸 남자 친구인 아들을 제외한 다른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분이셨다.
그리고 금전적인 것 관련해서는 무조건 남자가 하는 거라며 집이나 예복 같은 걸 굳이 고집스럽게 아버지가 내시겠다고 했다.
무조건 제일 좋은 걸로 아버님이 해주신다며…
그 당시 아버지의 즐거움은 우리 둘을 위해 탄탄한 길을 만들어 주시는 걸 상상하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결혼반지를 맞출 때, 스드메 등 여러 계약금을 낼 때, 신혼여행 준비를 할 때...
심지어 아파트 가계약금을 낼 때도... 내 돈을 먼저 쓰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도 작지만 내 가게를 운영 중이었고 집에서도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상황이어서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님은 남자 친구를 통해 절대 내 돈을 쓰지 말라며 조금만 기다렸다 돈을 받아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결혼 날짜는 다가오는데 어떻게 이를 미룰 수가 있을까...
내가 먼저 결제한 돈은 바로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게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은 없고...
계속 같은 말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결혼하면 네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네 돈인데 뭐.
오히려 우리 집에서도 신랑 측에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는 예단을 이것저것 준비하고 싶어 했다.
시계며 양복이며 가방이며... 내가 우리 집 첫 결혼이었기 때문에 뭐든 다 해주고 싶어 했던 엄마였는데 남자 친구의 집에서는 관심이 없는 건지 제대로 된 말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기 동안 아버님의 사업이자 남자 친구가 물려받기 위해 일하던 회사가 어려워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님 본인의 전성기라며 자신의 아들에게 모든 걸 주려고 했던 그의 사업은 한순간에 힘들어져 그간 벌려놓은 일들을 감당하기 힘들게 된 듯했다.
두 달 전 집 계약금을 냈다는 아버지의 말도, 이미 잔금을 치렀다는 남자 친구의 말도 모두 거짓이었다.
마음속 한구석에 있던 쎄함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프러포즈를 받은 다음 날,
전 주인이 이사를 간 이제 우리 신혼집을 보러 가서, 바로 그 아파트 주차장에서 듣게 되었다.
남자 친구는 나보다 며칠은 더 빨리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듯했지만 끝까지 돈이 들어올 수도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이런 일이 생겼으면 같이 해결해갈 생각을 해야지. 혼자 숨기고 있다가 우리 결혼 못해? 어제 나한테 프러포즈 한 사람이 할 말이야? 우리 다다음주가 결혼이야!"
간신히 내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자 친구는 곧바로 그 말을 한걸 후회한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 말하면 안 됐다고.
그런데 그만큼 절망스럽고 자기 자신이 한없이 작고 무기력하다고 했다.
하필이면 이날은 코로나에, 시할머니의 건강 악화에.. 여러 악재들로 두 번이나 밀린 우리의 상견례 날이었다.
당연히 상견례는 취소.
그래도 난 아버님을 직접 만나야 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버님이었다.
"가자, 사무실로."
처음 뵙는 아버님은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회사가 수습 불가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고 부도가 나거나 큰 빚을 떠안을 수도 있는 듯했다.
아버님은 나를 직접 보니 더 마음이 쓰리다며, 나 같은 고운 며느리를 정말 받고 싶었지만
우리 집 같이 험한 일 하는 곳에 너 같은 귀한 아이를 데려올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곤 더 이상 날 보지 못하시고 자리를 뜨셨다.
정말 한마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아버님 본인이야 말로 마지막까지 돈이 나올 곳을 찾고 또 찾아다녔을 터였다.
잘못된 방식이지만 그게 아버님이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살아온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눈물에 남자 친구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상견례가 잡힌 날이라 집에서 대기 중이던 나의 부모님이 나를 데리러 왔다.
남자 친구와 나한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전해 들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왜 우리 엄마 아빠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너무 미안하고 또 이런 상황을 보여주는 나도 너무 창피했다.
그렇지만 내 부모님은 참 강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힘들 남자 친구에게 마음 단단히 먹으라며 달랜 후, 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단호하게 이 결혼은 안 되는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에게 솔직히 말을 했다면 난 월세 방이라도 구해서 처음부터 둘이 시작하면 된다고 불구덩이에 함께 들어가자고 했을 것이다.
사실 불안의 시그널을 느끼면서 남자 친구에게 정 안되면 우리 둘이 이민이라도 가서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왜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사소하게 지나쳤던 남자 친구의 많은 말들에 불신이 생겼고 신혼집 앞까지 오며 말을 안 한 행동에 분노가 치밀었다.
긴 악몽을 꾸는 게 아닐까 하고 자꾸 내 뺨을 치게 되었다. 끔찍하게도 현실이었다.
첫사랑이었다. 거의 5년을 함께 한 사람이었고 정말 큰 사랑을 나에게 준 사람이었다.
나는 정말 이 만큼의 행복만으로도 충분했다.
내 행복을 더 바랬던 사람은 남자 친구였다.
그래서 그는 무너져 내렸다.
우리 둘의 관계가 정리되기 전에
양가 부모님들은 우리의 결혼을 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