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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Nov 19. 2022

결혼하기 딱 좋은 날이네

왜 날씨는 좋고 난리야.

11월의 어느 토요일.

올해 다이어리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한 페이지였던 오늘.


다가올 이 날을 꾸미기 위해 마스킹 테이프도 사고, 귀염 뽀짝 한 스티커들을 얼마나 샀던가.

고등학생 이후로 스케줄 노트를 쓰지 않던 나인데,

특별한 한 해가 될 것 같아서 2021년 말에 공들여 골랐던 다이어리였다.



그리고 하루하루에 가득 글자를 담아 써 내려갔던 날들.

내가 쓴 글자들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아직 다이어리를 열어보지 못했다.


며칠 전 들른 본가에서 식탁 위, 또 엄마의 화장대에 놓여있던 달력을 보았다.

일부러 달력을 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오늘 날짜.

그리고 검게 그어진 줄.

매직펜으로 덮인 네모 칸.


올 한 해 내가 가장 기다렸던 이 날은

이제 그냥 검은 하루가 되었고 더 이상 세지 못하는 날이 되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날씨도 너무 좋았다.

11월 답지 않게 따뜻한 날이었다.

집을 나서자마자 날씨가 너무 좋아서 심술이 났다.


 "아, 결혼하기 딱 좋은 날이네."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미국에서 겸사겸사 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한국에 온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야무진 친구는 식장 근처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으려고 예약을 해 놓아서 내 결혼식이 취소되었어도 이곳까지 온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데리러 간다고 했고, 친구는 조심스럽게

 "힘들지 않겠어?"

 라고 물었다.


 "괜찮아. 그냥 결혼할 뻔 한 보통의 날인걸."

 이라고 대답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하필이면 결혼식을 하기로 했던 웨딩홀을 지나가야 했다.

수많은 하객들과 얼핏 보이는 웨딩드레스 실루엣.


다들 잘만 하는 결혼이 나한테는 왜 이렇게 야박했고 힘들었을까.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한 방울도 울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친구를 만나 같이 밥을 먹고 포토이즘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도 이상할 만큼 괜찮았다.

오늘은 정말 울지 않아야지, 하고 마음먹어서인지 담담하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친구의 사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결혼한 지 2년 차가 된 친구와 각자 저마다의 힘듦을 얘기하고 위로했다.

친구가 말했다.


"우리 대학생 때도 힘든 일 많았잖아. 그때는 어떤 일이 터져도 학교로 돌아가서 그냥 평소처럼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면 됐는데. 지금은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어."


7년 전의 우리를 떠올리며,

7년 후의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져 있기를 서로 바래 주며 짧은 만남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가득 채웠다.

자동차 워셔액이 떨어진 지 꽤 오래되었다.

전에 워셔액을 혼자 채우는데 바보같이 보닛 지지대를 안 걸어놔서 머리를 세게 박아버렸다.

너무 아파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발을 동동 굴렀었다.



10월에 워셔액이 떨어진 걸 보고, Y에게 워셔액을 채워달라고 했다.

"이런 건 원래 남편이 해주는 거잖아."

사실 운전한 지 10년이 넘었고 여러 차의 워셔액을 직접 채워봤지만,

괜히 어린양을 부리고 싶었나 보다.


주유소 사무실에서 워셔액을 결제했다.

내가 가져가려고 했는데 직원분이 당연하게 내 차로 오셔서 워셔액을 채워주셨다.

3,500원.

삼천 오백 원이면 머리를 박지 않고도, 그에게 부탁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몇 주 동안 먼지가 뽀얗게 앉은 유리창에 시원하게 워셔액을 뿌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정말 오늘 하루 울지 않았다.


날씨가 좋았던 그냥 보통의 날이 지나간다.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네?

남은 몇 시간도 보통의 날처럼 보내야겠다.


내일이 곧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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