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28.
콘텐츠 시장에서 일종의 인플레이션이 유도되고 있다. 창작물에 대한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서다. 이는 단순한 비유지만, 창작물이 채권으로 기능하는 바로 그 지점에 콘텐츠 시장이 발생한다는 식으로 인과를 명확히 하고 나면 비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게 된다. 흐름은 제도에서 출발한다. 현대 예술제도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제도를 규정하는 담론이 수평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수평은 그것을 향한 기대와 반대되는 현실을 보상함으로써만 실체를 얻는다. 어쩔 도리 없이, 언제나 예술은 개념화한 채로 오는 무엇이다. 다만 향유 계층이 예술에 투영하는 환상 안에서 절대적인 기준 제공자가 갈수록 희미하게 전제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작품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노출되는지를 묻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노출되는지를 묻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지만 무엇이 보이는지는 확실히 안다. 플랫폼에 공인력이 있다는 건 충분하게 대상화될 수 있을 만한 자기증식의 역량, 즉 자본력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콘텐츠는 대상화되지 않으면 말 그대로 공적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이는 사회적 전시의 문제로 직결한다. 개인방송의 발언권이 세지고 있다는 데서 전시 권력의 다원화와 공정한 분배를 전망하는 건 성급하고 때로 유해하다. 그 현상은 오히려 전통적인 기업방송의 전망을 많은 이들이 성공적으로 내면화했음을 나타낸다. 전시의 핵심이 되는 환상은 포괄성이다. 송출자는 수신자에게 가능한 모든 선택지를 포괄하는, 무한히 재조립되는 닫힌 방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는 지상에 (이미 어떤 기대를 품은 명명인) 정보의 '홍수'를 내리는 꿈을 꾼다. 이 과정에 도입되는 자아상은 거의 신적인 편재성을 띤다. 그는 콘텐츠인 자신을 통해 자신을 본다. 목격되지 않은 자신은, 그의 인식 지평에서는, 없다. 따라서 최대한의 존재감을 공인받기 위해 그가 취하는 전략은 이미 마케팅의 일환으로 잘 알려진 바, 스스로 바이러스적인viral 침투력을 지니는 것이다.
미디어 플랫폼의 규모는 2010년대에 대거 성장했다. 시장이 커졌고, 노출이 원활해짐에 따라 수요도 커졌고, 창작자 입장에서도 이른바 '파이'가 커졌다는 인식은 일견 옳다. 그러나 파이는 그 비유가 쉽게 연상하게 하는 방식으로 커지는 게 아니다. 그것이 더 많이 깜빡이게 된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것의 원관념인 돈과 마찬가지로, 파이는 범위 내에 기대된 교통량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중앙으로의 유도가 끊기면 창작자 집단이 창작했다고 생각한 파이와 함께 창작력도 형체를 잃는다(이것이 마르크스주의 구조론의 역설적 귀결 같다). 바로 이 지점에 채권으로서의 창작물이 개입한다. 창작 노동자와 공조하며 전시 능력에 기생하는 형태의 기업체는 창작물을 일종의 부채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것을 통해 유도되리라고 기대하는 구독의 양과 그에 따른 지불이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비유에서 금리는 공급자 반대편으로부터의 기대를 가리킨다. 구독자 또한 그가 감상 활동에 투여한 여러 자원이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즐거움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이때 비유의 가장 이상하고도 절묘한 면이 드러난다. '즐거움'은 일원화capitalize되지 않은 가치 체계여서 창작자도, 기업체조차도 정확히 어떤 영역에서 잉여를 만들지 결정하기 어렵다는 점이 그것이다. 어떤 이들은 콘텐츠가 자신의 삶과 그것을 향한 자기 시선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느낌을 받길 기대한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일반적인 경제 원리로 볼 때 무척 독특하게도, 콘텐츠가 자기 시간을 '죽여주기'를 기대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생체의 가장 안정적인 접근법은, 상품에 대한 기대치를 소비자가 투여한 설정값 자체로 전환하여 격차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요컨대 플랫폼은 감상자가 감상하게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을 감상시킨다는 얘기다. 알고리즘 피드와 조합된 구독 시스템은 그런 면에서 탁월하다. 콘텐츠의 거래는 망망대해에서 궁극의 취향을 찾아 떠나는 탐험으로 낭만적으로 재구성된다. 수요자이자 공급 주체로서 이자소득 보장의 책임도 구독자가 나누어 진다. 우리는 즐거움의 공회전에 매개된, 강박적인 향유자로 상정된다.
웹 환경에서 전통적으로 이율이 낮게 유지되어 온 플랫폼은 오픈 커뮤니티다. 그곳의 독자들은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큰 몰입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연하고 비정량적인, 그러나 커뮤니티의 어법에 따라 충분히 윤색된 콘텐츠 덩어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접속한다. 따라서, 이를테면 웹툰 서비스 회사들이 '오랜 태동기'를 벗어나 과도기를 맞던 시점에, 일종의 발권력을 동원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약하던 밈 생산자들을 영입(저자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 현상은 최근 웹소설 원작 만화 공급의 유행으로 반복 중이다. 웹소설 플랫폼 또한 수요 환원주의 이념, 유목민적 소비 양태, 순수하게 경쟁적인 발화 권력의 공유지라는 환상 등 콘텐츠 시장에서 저금리 기조를 이루는 요소들에 뿌리내려 왔고, 그럼에 따라 질적 부응의 문제, 달리 말해 비평적 딜레마를 우회하는 상품들의 보고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화회사' 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체 누가 그 생산물을 원하는가? 그러나 앞선 논조에 따라 이런 현상을 시장의 경색을 막기 위한 과공급으로 읽어낼 땐 주의해야 한다. 우스개로 '수요 없는 공급'이라고 말할 때 이는 어떤 실패를 연상케 하는데, 실로 기업은 그 공급을 통해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바 이것이야말로 시장 경제 체제에서 자본주의적 기획으로 이행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공황은 빠르게 정치적 현상으로 재구성된다. 무엇을 현전하는 것으로, 이 맥락에서는 판매 가능한 작품으로 공인할 것인가(즉 무엇이 신뢰 받는 통화currency인가)의 문제가 대두한다. 이에 한정적으로 예술관과 미학적 전망이 콘텐츠 제공자가 지닌 권리의 주안점으로 되돌아온다. 그 결론은 간략히 말해 다음과 같다. 당신이 예술이다.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 예술이다.
그렇다면 우린 감옥에 갇힌 건가?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즐거움에 대해 말할 때 그 감옥의 정합성은 깨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 미래에 얽힌 존재인 한 인간은 경제적으로 어긋난 존재다. 그는 즐거움이 그를 만들도록 내버려둔다. 제 역할을 요청하는 어떤 물질이, 그게 영화든, 만화든, 글이든, 타인(심지어 자기)이든, 무엇이 그를 어떤 만남의 경험에 밀어 넣도록 자신을 노출시킨다. 앞서 활용한 비유로서의 경제 체계가 문화의 역동을 다 포괄하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예술은 경제보다 거대하지 않고, 경제의 반대항으로 있지도 않으며, 예술은 그저 불가능한 객관성으로 있다. 그것이 카카오 페이지에 있든 넷플릭스에 있든 마찬가지다. 첨단의 콘텐츠 산업 구조는 매우 유연하다. 이 유연함은 두 가지 방향으로 구조를 감춘다. 한편으로는 전제된 위계 없이 순수하게 민주적인 경쟁선 위에 나란히 놓인 듯한 작품들의 배후에 근본 원리로서의 트래픽의 경영학이 있음을 감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배후에 근원적인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음을 감춘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의도의 감옥에 통합되는 게 두려워서 그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기로 한다면, 우리는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을 회피하는 셈이다. 경로는 다른 경로들의 겹침을 통해서만 변화한다. 모든 예술 경험은 즐거움을 되돌아오게 하는 동시에 즐거움을 개조하는 힘이다. 그리고 다른 즐거움이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비평적 정신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이고, 그보다 급진적인 실천은 내가 알기론 없다. 대영박물관에는 영국의 제국적 위상을 예증하기 위해 수집된 수백 만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가령 들뢰즈가 그곳에 갔다면, 그 전시물에 새겨진 지표들로부터 그는 의도와 정반대의 것, 즉 예술성이란 이런 방식으로 응집하고 축적시켜서 어떤 개체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님을 논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예상별점'이 나에게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였던가를 잊지 말자. 그 구체적인 수치뿐 아니라 형식마저도 결코 의도된 제 역할을 해낸 적이 없다. 그것이 나의 판단과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어쩌면 나의 판단이라는 게 작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