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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Mar 19. 2022

격언

2022. 03. 18.

격언? 좋다. 사람에겐 수시로 지적 도약이 필요하다. 도약은 몇 단계를 뛰어넘는다는 뜻인데, 엄밀한 의미에서 지적 도약이란 몇 단계를 거꾸로 밟는다는 뜻이지 실제로 밟지 않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남긴다는 뜻은 아니다. 도약은 소급하는 사유를 요청한다. 그것은 단 하나의 출발지에 대한 굳은 관념을 깨부순다. 만약 좋은 사유의 조건이 여러 개의 출발지를 상정하는 것이었다면 그야말로 의심스러운 일일 것이다. 좋은 사유는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는 출발지, 이른바 동일성을 계속 재규정함으로써 동일성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이때 격언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비일상적 접합이 이루어진 문장으로서 격언은 수신자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생각의 길을 연역하게끔 한다. 그러나 여기엔 위험성도 있다. 많은 경우에 격언이 주는 도약의 감각은 도피성이기 때문이다. 격언은 종종 한눈에 쉽게 들어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멀찍이서 조망된 세계를 선물한다. 이때 수신자는 딱히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않고 출발지를 재설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관찰자로서 일종의 수직 이동을 했다는 환상만을 가진다. 요컨대, 이 경우에 격언은 수신자가 실제로는 모르는 것을 항상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격언이라는 이름부터 기만적이다. 격(格)은 분수와 역할을 가리킨다. 즉 구조적으로 마련된 자리에 맞게 때려서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반면 큰 틀에서 사유의 조탁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파)격의 문장에 철학이 주로 붙이는 이름은 격언이 아니라 테제(정립, thesis)다. 변증법적 사유에서 정립은 항상 반정립을 예비하고 또 반정립을 발생시키며, 반정립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 철학적 명제도 물론 목적을 지닌다. 그러나 철학적 명제는 어떤 사회적 이해(interest)에 접속하기 전까지 철저히 무관심한 것, 무관심을 요청하는 움직임으로 남는다. 철학에 불가분한 예술성이 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다. 책을 안 읽는 사람도 아니다. 책을 한 권만 읽는 사람의 철학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많은 호응을 받는 어느 방송인의 이 말은 대개 온당히 이해받지 못한다. 높은 확률로, 그 말을 옮기는 사람 자신에게조차도. 흔히 이것은 하나의 판단 체계만 보유한 사람은 폭력적인 독선에 빠지게 된다는 뜻으로 통용된다. 심지어 이 독선은 아무런 지적 입력이 없는 '순결한' 상태보다 나쁜 것으로 파악된다. 불온한 무언가가 머릿속에 주입된 사람보다는 세계를 피상적인 면 그대로 이해하는 무식자가 사회의 질서 측면에서 더 낫다는 것이다. 여기엔 꽤 많은 오해가 중첩되어 있다. 독서의 기능과 성질에 대한 오해들이. 독서는 정보를 주입받는 피동의 일이 아니다. 정보에 접속하고 정보를 전개시키는 주체가 만들어지는 일이다. 책을 단 한 권만 읽더라도 그 독서에서는 독자 자신의 삶이 함께 읽힌다. 그런데 삶은 무엇인가? 그 자체가 (최소한) 한 권씩의 책인 타인들과, 그들 각각이 인용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책들이 한꺼번에 개입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한 권만 읽을 수는 없다. 엄격하게 따지면 우리 중 누구도 평생 딱 한 권의 책조차 '완전하게' 읽어낼 수 없다. 독서는 독서의 안쪽으로 확장하는 모순된 행위다. 간단히 말해, 독서는 복잡해지는 일이다.


책을 열심히 찾아 읽든 말든 사람은 폭력적일 수 있다. 의식되지 않는 폭력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크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텍스트는 너무 많은 형태로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 벽의 낙서가 텍스트다. 그 낙서를 하는 나의 친구(로 나타나는 것)도 텍스트다. 친구를 보는 나의 관점과 거기서 유발되는 인상도 텍스트다. 그 사이를 비집는 순간의 비선형적인 연결로 독서는 이루어진다. 따라서 책은 교양을 양적으로 늘리거나 (내내 그것과 비슷한 의미로) 다각화하는, 알라딘이나 교보문고에서 취급하는 상품이기만 한 게 아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자신이 가장 먼저 읽을 문장들을 발생시키며 살고 있다. 결국 책이라는 사물을 통해 구별 가능한 건 독서의 양이 아닌 태도고 믿음이다. 그 스스로 책을 전혀 안 읽을 수 있다고 믿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주입받지 않고 속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는 사람은 순진하거나 실로 위태롭다. 한편, 평생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어 그것을 더할 수 없이 투명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대개 엄숙하다. 그가 무서운지 아닌지는 전혀 다른 계기로 가늠할 문제다.


앞서 예시로 든 격언의 창작자에게 평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 어느 유명 희극인의 말도 함께 검토해본다.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품으면 무섭다."라는 말. 여기서의 '신념'은 사실상 좁게 맥락화된 '이념'에 가까운 말로 읽힌다. 아마도 그건 반성을 결여한 이념일 것이다. 그런데 이념은 심지어 반성적일 때조차, 그 반성이 전제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자기충족적일 수 있는 무엇이다. 즉 반성도 교착의 한 양상일 수 있다. 결국 이처럼 많은 필터링을 거쳐 특정된 개념어로서 어떤 이념, 그것이 얄팍한 판단 체계를 갖춘 사람과 만날 때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는 얘기다(잘 모르고 무식하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나 이쯤 해석하는 게 상책이겠다). 저 격언에서의 '신념'은 니체가 비판하던 그 신념과도 조금 다르다. 니체에게 신념은 이성을 중단시킨 결과로 나타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그가 비판한 신념은 이성의 한 극단적인 도착이다. 이성의 작용 가운데 신화화되고 내밀해져 실재와 닿지 않게 된 부분을 일컫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위 격언에서 간접적으로 칭송받는 기질인) 유식함에 대해서도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신념이라는 말은 이처럼 자의적으로 쓰였다. 앞뒤 맥락을 고려하면 딱히 철학사적 배경 위에서 적절하게 쓰인 말도 아닌 것 같다. 아예 저 신념을 일상어로 본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오히려 격언은 반대로 되었어야 옳다. 사람의 지적 수준에 대해 계급주의적이고 천박한 평가를 하려 들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설마 그런 의도로 무식 운운을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도 '무식한 사람'이란 둘 중 하나다. 무식하다고 평가되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이거나, 무식하다고 자각하기 때문에 무식한 사람이다. 어느 경우에든 무식한 사람은 그의 바깥에서 그를 평가하는 이에게 과제처럼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 자신에 대하여 문제적인 존재다. 그는 자신의 무식함을 짓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신념이야말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무식함을 자각한 이상(즉 앎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 이상) 그는 반드시 온갖 앎에 노출되게 마련인데, 앎을 여러 각도로 재배치하면서도 여전히 어떤 옳음을 지향하려면 적어도 한 종류의 믿음, 자신의 자유로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만이 자유의 실행이기 때문이다. 정말 '무서운' 경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이 무엇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신념을 결여한 경우. 이때 사람은 비겁해진다. 또 자신이 무엇을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의 앎에 대해 동어반복적인) 이념에 몰두하는 경우. 이때 사람은 나약해진다. 그는 물론 폭력적이게도 되고 위험하게도 된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그가 자기 부정확한 앎을 강화하고 이념을 방어해주는 격언을 만들어내곤 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격언이냐 테제냐 하는 이분법 따위가 아니다. 사고방식의 지역적 전통과도 다른 문제다. 당연한 얘기지만 동양의 철학에는 물론이거니와 동양의 일상 속에도 테제는 늘 있었다. 격언 또한 언제나 뭔가를 주장하는 명제였다. 그 수수께끼 같은 말씀들이 비유하는 바를 올바르게 위치 지을 필요가 있을 뿐이고,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알기 쉬운 통찰에 대한 알기 쉬운 공감. 그런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문제를 잠정적으로 사분하여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폐쇄적인 것이 있고, 해방적인 것이 있다. 발신자가 있고, 수신자가 있다. 발신자가 언술을 해방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신자가 수신한 것을 폐쇄적으로 전개할 수도 있다. 반대도 가능하다. 수신자로서 우리는 발신자마저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런데 어디로 해방을 해? 자기를 흔들고 자꾸 뒤집는 공공으로, 정의로 한다. 따라서 독해가 가장 먼저 정의로워져야 한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다. 텍스트는 항상 덧입혀지는 것이다. 뒷배를 두고 강림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갑자기 나타나서 벼락 같은 깨달음을 줄 수 있을 리 없다. 벼락이 쳤다면 단지 내가 그만큼 빨리 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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