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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Mar 26. 2022

소설

2022. 03. 25.

요즘 다른 글을 쓰느라 일기 쓰기가 뜸해졌다. 연재하는 글이야 이미 완성된 원고가 있어서 다듬기만 해서 올리면 되는데 그마저도 어렵다. 뭐를 쓴다는 게 그렇다. 쓰려면 읽기도 해야 한다(의무감으로 쓰려면 더 많이 읽어야 할 것이다). 쓰고 읽으려면 체력이 있어야 하므로 잘 먹고 운동도 해야 한다. 그러면 생계 유지는 어느 틈에 하는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는 지금 한시적으로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그럴 자격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여러 종류의 글을 써서 낭비하는 중이다. 낭비란 좋은 것이다. 그걸 통해서만 내가 뭔가 당연하지 않은 것, 지금 여기에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 내가 만드는 것은 소설이다.


시나 소설이나 쓸 때 비슷하다. 그렇게 나는 느끼는데 합당한 느낌인지는 모른다. 현대 문단 문학(문학 문단?)의 최심부를 차지한 두 갈래인 시와 소설의 차이와 교호를 두고 지어진 유명한 말들이 떠오른다. 신형철 평론가가 아마 그렇게 말했다. 좋은 시는 얼마간 소설이고 좋은 소설도 얼마간 시여야 한다고. 사실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 안에서 '시적인 것'을 비롯해 어떤 카테고리든지 배제하고 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기는 어렵겠다. 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적어도 소설이 되기를 싫어하는 시는 시적일 수 없다. 시는 자신과 정확히 같은 모양을 한 어떤 소설과 더불어서 읽힐 수밖에 없는 텍스트다. 시적인 것은 기이한 가능성으로서 나타난다. 기반 없는 무한한 상상력에 대한 불가능한 기획에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와 소설에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 그러면 이건 다 실수고 내가 쓴 소설은 안타깝게도 소설적인 것이 결여된, 불가피하게 문학이 된 눈치 없는 시도(방금 떠올린 말의 조합인데 정말 최악이다)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고민은 학부 2년쯤에 떼고 왔어야 하는 것이다. 제가 원래 시를 쓰는데 이번에 소설을 쓰게 되면서 어쩌고 저쩌고. 별수가 없다. 원래 나는 하던 고민을 계속 한다. 고민이 새로 생기면 아예 학부 2년쯤의 나에게 맡겨두기도 한다. 나중에 돌려 받으면 고민이 어찌나 지저분해져 있는지, 이건 내 고민이 아니잖아. 지금 해야 할 고민이 아니잖아. 제발 내 것을 돌려줘라...... 그런 상태가 다.


일기 쓰기가 뜸해졌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더 이상 일기 형식으로 쓰는 글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일기라고 생각하고 쓰는데 읽을 때는 역시 일기처럼 보이지 않고 사변적인 면이 강조되어 보인다고, 유일한 구독자가 얘기해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사변적인 글은 아니다. 일상적 경험과 마주침에 기대어서 쓰는 글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사고 활동이라는 일상의 한 부분을 옮겨놓을 뿐이라는 식으로 보면 그야말로 일기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그럼 어떡할까. 결국 여기저기로 튈 수밖에 없는 (비일상적인) 일상을 일기라는 중립적인 틀에 담아보고자 했던 건데, 그런 기획을 아예 포기할 수도 없고, 일기라고 우기며 계속 쓰기엔 실제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부정확하게 재현하는 이름이 될 위험이 있다. 고민 끝에 떠올린 것이 관찰이다. 나는 이제 관찰을 한다. 그러나 딱히 예전과 다른 일을 하는 것 아니고, 다른 종류의 관찰을 시작한 것도 아니다.


『관찰』은 프란츠 카프카의 초기 산문 소품집이다. 내겐 몇 번이고 다시 꺼내볼 만한 시집이기도 하다. 원제는 'Betrachtung'이고, 영역본 제목은 'Contemplation'으로 알려져 있다. 세 단어 모두 비슷한 뜻을 지녔다. 내 머릿속 조그마한 사전에서 contemplation은 미학적 배경이 있는 단어다. 가령 벤야민에 관한 영어권의 논의에서 이 단어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수용자를 하나의 맥락에 흡수시키며 자기를 특수한 위상으로 격리하는 종래의 예술 작품과, 복제기술의 등장 이후 유일성을 상실한 산만하고 불연속적인 예술 작품을 구분한다. 이때 contemplation은 전통적인 감상법, 즉 예술에 대한 관조적이며 통합주의적인 접근을 나타낸다. 독어에서도 betrachtung은 비슷한 활동 반경을 가진 단어이므로 이 번역은 잘된 번역 같다. 비록 거의 일대일 대응하는 kontemplation이라는 독어가 있지만 말이다(이렇게 되면 카프카의 작품 제목이 마치 미학적 개념어로 쓰인 것 같은 인상이 강해진다). 한편 관찰이라는 말은 이런 흐름에서 약간 벗어나 있고 일상적인 감각에 보다 잘 어우러진다. 영역의 방향성을 따르자면 관조나 숙고로 번역할 수도 있었겠으나 카프카가 실제로 그런 의도로 제목을 지었을 것 같지는 않다. '관찰'은 충분히 잘된 번역이다. 말 자체로도 마음에 든다.


『관찰』에는 인상적인 작품이 많다. 지금 떠오르는 것은 경마장의 기수와 관중석의 모습을 그린 한 장면이다. 거기에서 기수들은 패배자로서 영생을 얻는다. 관중은 무작위의 어떤 기수를 승리로 몰아넣는다. 그곳에 정말 승리가 존재해서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직 이미 패배한 사람들만이 그들 사이에 승리라는 공터를 만들 수 있고, 그 안에 갇혀서 자기 기쁨을 마주하는 수모를 겪지 않을 수 있다. 거기 모인 이들 모두가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쫓겨난 사람들이다. 이제 여기서 떠나라, 누가 명령해주기 전까지는 그곳을 맴도는 수밖에 없다. 그런 짧은 소설이다. 물론 시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 근거 중에는 견고한 것도 있고 엉성한 것도 있다. 지금 내게 가장 설득적으로 느껴지는 근거는 이것이다. 경마장에 관한 글을 쓰는 카프카를 상상할 때, 그의 창작기계가 시 쓰는 사람의 그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고밖에는 상상이 안 된다는 것. 그는 (물리적으로든 아니든) 경마장에 있었다. 시인이나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패배자로서, 그러나 어떤 기만을 통과하더라도 자신은 관찰자이고 받아적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자각과 함께. 그렇게 읽어야만 하게끔 그가 썼다. 바로 여기에. 나는 그 흔적을 추적하면서...... 추적당한다. 읽기의 기쁨이 다른 게 아닌 것 같다. 읽다보면 어느 시점에 글은 분류된 것으로서 나타나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이것을 네가 썼다고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시도 소설도 아니다. 너의 삶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너의 삶은 무언가가 된다고.


같은 접근법으로 관찰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관찰은 뜻이 비슷한 두 한자의 조합이다.


관(觀)은 황새가 보는 것을 뜻한다. 황새는 성대가 퇴화하여 울지 못하는 새다. 그러나 그 목은 아주 가늘고 긴 울음을 뽑아낼 것처럼 가늘고 길어서, 자칫 쉽게 부러질 것 같다. 목이 기니까 먹이는 위장에 더 늦게 도달할 것이다. 전래되는 바에 따르면, 황새는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겨루는 자리에서 뇌물을 취하고 부정 심사를 저질러 다른 새들에 의해 목이 잡아 늘여졌다고 한다. 황새는 나무에 오르는 습성이 있다. 언제나 땅에서 더 먼 곳에 오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긴 목을 뺀다. 얼마나 멀리 보려 하는가? 얼마나 깊은 데까지 봐야 안심할 수 있는가? 단지 머리를 더 높이 들어올리기 위한 지지대로서 그 목은 길어진 것 같다. 목의 말단에 조그마한 뇌가 있으리라. 그렇다면 황새가 날아오를 때 비행긴 목의 연장이다. 나무의 연장이다. 눈과 뇌의 연장이다. 황새를 새로 만든 것은 날개가 아니다. 더 멀리 더 깊이 내려다보는 일에 대한 집착이다.


찰(察)은 집 안에 차리는 제사상을 뜻한다. 그 구성요소인 제(祭)는 제단(示)에 고기(⺼)를 올려 놓는 손(又)의 도상이다. 이 한자는 제의가 품은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도 충실하다. 제단에 올라간 고기는 성육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생명 유지를 위해 먹던 다른 생명체의 살점이 아니다. 그것은 몸 없는 존재의 몸이다. 그것을 삼킬 목이 없는 존재에게 주는 먹이다. 제단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거기에 대고 절하는 순간 장소가 갈라진다. 그때 그곳에 한하여 고유한, 어떤 절대적인 질서가 발생하고 인간에게서 멀어져 간다. 우리는 그것을 멀리에서 볼 수밖에 없다. 그 거리감 자체를 감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단에 고기를 올린 그 손은 누구의 손인가? 우리의 손이다. 한자는 바로 그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육이 성스럽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번 더럽혀져야 한다. 인간과 접촉해야 한다. 접촉이 없으면 분리도 없고 분리되었음을 느낄 인간도 없다. 신이 신을 사랑하는 신관보다는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자들에게 항상 더 가까웠듯이 예술도 그렇다. 우리의 감상 가운데서 예술이 발생할 때, 정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작품에 '누구'의 손이 닿았는가가 아니다. 그 작품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는 사실이다. 작품은 우리에게 말한다. 네 손끝에서 이것이 태어났다고 상상해보라고. 이것은 절대로 깨끗하거나 결백하지 않고, 이것이 우리의 최선이라고.


요컨대 관찰은 대상에 다가가면서 튕겨내지는 일이다. 거리를 만들면서 사이까지 만드는 일이다. 내가 당신을 관찰한다면 그건 우리가 비로소 우리라는 선언이고 믿음이다. 더 멀리 더 깊이, 더 많고 더 작은 것들을 찾아내는 일에 대한 집착, 그것은 추락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얼마나 먼가? 아주 느린 추락으로 지금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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