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인천으로 | 굿모닝인천 2월 Vol.362
750만 재외동포와 300만 인천 시민의 염원이 이루어진 도시. ‘재외동포청을 품은 도시, 인천’에 고려인의 후손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부모들의 오랜 꿈과 그리움을 길잡이 삼아, 아직은 서툴고 낯설지만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고향에 돌아오기까지 한 세기, 먼 길을 돌고 돌아온 우리의 형제들은 힘들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 행복한 꿈을 꿉니다. 1,000만 국제도시, 재외동포의 역사적 뿌리, 인천. 이곳이 우리가 꿈꾸던 고향입니다.
"1,000만 국제도시,
재외동포의 역사적 뿌리, 인천
이곳이 우리가 꿈꾸던
고향입니다"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첫새벽, 어둠을 헤치고 달려온 통근버스가 마을의 아침을 깨운다. 함박마을의 하루는 여느 곳보다 일찍 시작된다. 출근이 이른 공장 근무자들이 많아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모두들 일터로 향한다. 수 대에 걸친 유랑의 역사만큼 멀어진 마음의 거리를 되짚어 ‘기억 속 조상의 땅’을 찾은 고려인 3세들은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고단한 아침 속으로 뛰어든다.
어린이집, 유치원도 새벽같이 문을 연다. 잠에 취한 세 살배기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긴 고려인 엄마는 통근버스 정류장으로 분주히 발길을 재촉했다. 서툰 한국말로 ‘다른 나라 아니에요. 우리의 고향이에요.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요. 그게 우리의 꿈이에요’란 말을 남기고.
출근 행렬이 한풀 꺾일 즈음,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의 ‘꿈너머돌봄교실’도 문을 연다. 1세부터 5세 아이들이 한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혀 단체 생활과 학업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요즘 설날을 앞두고 윷놀이에 빠져 있는 아이들, 윷짝을 하나씩 들고 내던지는 게 전부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땅’에서 자신의 뿌리를 알아가고, 희망의 싹을 틔우는 함박마을 아이들의 일상이다.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 온 가족이 뿌리내린 터전, 몸과 마음의 고향, 인천에서 고려인 아이들의 꿈이 무럭무럭 자란다.
고려인 강제 이주(1937~1938년)
- 연해주의 라즈돌리노예 기차역에서 첫 열차 출발 18만 고려인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강제 이주
- 소련 정부의 한글 교육 금지(1938)
고난과 개척의 시기(1939~1955년)
- 황무지, 파산 집단농장 등으로 재배치. 이주 제한
- 고려인들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농업 크게 발전
우수한 민족으로 자리매김(1955~1990년)
- 고려인 이주 제한이 해제되고 도시 진출(1956)
- 신분 상승의 열망으로 적극적인 교육 투자(1960년대)
- 높은 대학 진학률, 55%가 전문 직종 종사(1980년대)
소련의 붕괴와 재이주(1991년 이후)
- 갑작스러운 소련 해체로 고려인들 재이주
- 한국-러시아 첫 수교(1995)
고려인 귀국의 문 열려(2007년 이후)
- 고려인 모국 귀환(2007)
- 재외동포청 출범, 인천 고려인 문화주권 선포(2023)
1937년,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버려진 고려인. 강제 이주 후 고려인들은 생존과 미래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볍씨 하나 틔울 수 없었던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냈고, 교육으로 신분 상승의 디딤돌을 만들어냈다. ‘공부만이 민족이 살길이다’라는 믿음으로 밥을 굶어가면서도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 결과, 2세대들의 대학 진학률은 소련 내 최고 수준이 되었고 카자흐스탄의 경우 평균의 2배를 넘었다. 고려인 3세부터는 우즈베키스탄의 소수 엘리트 민족으로 자리 잡았다.
애끓는 교육열을 지닌 민족,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맨손으로 새 삶의 터전을 일궈낸 기적의 주인공. 그들이 바로 고려인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고려인들이 최고였어요. 제일 똑똑했어요.” 고려인 3세 김이리나(53) 씨의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 뿌리에는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매일 밤 책을 읽던 외조부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다. “할아버지는 항상 ‘한글 책’을 읽었어요. 책장이 다 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어요. 그땐 잘 몰랐습니다. 그 시리고 아픈 마음을.” 17년 전, 부모들이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산 ‘한글 책’의 나라로 오는 길이 열렸다. 유년의 기억을 따라 인천에 왔다.
2007년 정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던 때의 기억을 묻자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돈다. “인천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감탄했어요.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어요. ‘큰 발전을 이뤄냈구나’. 한민족이란 게 자랑스러웠어요.” 그 순간, 고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났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안고, 바다를 건너 처음 온 곳은 남동국가산업단지. “인천에는 일자리가 많아요. 희망이 있어요.” 꿈을 빛으로 삼아 한국어 공부에 매진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그의 삶을 지탱했다. 이제 그녀는 함박마을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어엿한 사장이 돼, 고국을 찾은 사람들을 꽃처럼 활짝 핀 얼굴로 반겨주고 있다. 그에게서 고려인들의 밝은 오늘과 더 빛날 내일을 본다.
“드시오.” 레몬 홍차와 한국 사탕과 러시아 쿠키를 내어주는 조병수 할머니는 사투리를 쓴다. 그 말조차 많이 잊었다. 그래도 띄엄띄엄 한국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알아는 듣는데 말은 잘 못해요.” 유랑의 역사 속에서, 많은 기억들이 사라졌다.
우즈베키스탄 식당인 ‘차이하나’의 사장, 이유정(47) 씨는 최근 귀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엄마, 가을까지는 농장에서 일하고 겨울엔 시장에서 반찬 가게 했어요. ‘당근 김치’는 고려인들이 만든 건데 맛있어서 모든 나라 사람들이 먹게 됐어요. ‘국시’는 잔칫날에 먹는 국수예요.”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모들은 언젠가 자식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당근 김치와 국시 한 사발엔 자식들이 고향의 맛을 기억하기를 바란 어머니의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겨 있다.
동유럽 흑해 연안에 위치한 공화국, 조지아에서 온 김이리나(62) 씨는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아들의 재활 치료를 위해 귀국했다. 안정적인 치료를 위해 작년 ‘김-치즈’라는 식당을 열었다. 수제 치즈가 듬뿍 들어간 빵에 계란을 올려 먹는 ‘조지아의 국민빵, 하차푸리’가 인기 메뉴다.
그는 조지아에서 잘나가는 식당 오너 셰프였다. 그의 빛나던 시절이 그곳에 있다. 그러나 한국에 오게 됐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머물 것이다. 인천 안에서 새로운 꿈을 빚고, 이뤄나갈 것이다. 옛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근 김치와 국시 한사발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고려인들의
애달픈 밥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