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다. 사진 중에서도 필름사진.
열아홉 살 때부터 찍기 시작했으니, 십 년이 넘게 무언가를 찍어내는 중.
영화를 보는 일. 책을 읽는 행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시간. 모두 취미활동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가진 취미 중에 가장 그럴싸한 취미는-
필름사진을 찍는 일이다.
열여덟 살의 여름을 기점으로. 어떤 시간은 흐르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남겨놓지 않으면,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수 없게 된다는 것도.
‘카메라’라는 단어는 아직까지 어색한 느낌이 있다. 방송국 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유독 ‘카메라’라는 단어는 멀게만 느껴지더라.
나는 옛날사람처럼 ‘사진기’를 들고 다니던 고등학생이었다. ‘사진기’라고 불릴 때 비로소 그 쓰임새가 명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사진기’라는 말이 좋았던 걸 수도 있다. 보통의 수험생들이 입시공부에 허덕일 때. 어디에도 쓸 일 없는 사진을 찍으며, 십 대를 마무리했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무언가에 미치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닐 뿐이었다. 작고 귀여운 카메라도 아니고, 여고생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짙은 회색. 투박한 카메라. 아. 중간에 '사진과를 가보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DSLR 같은 최신식 디지털카메라가 없으면, 작품사진을 낼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필름사진을 찍어오라고 하는 사진과는 한 군데도 없었다. 사진과에 들어갔어도. 그만뒀을 것 같다. 학문적 접근을 경험하면, 이전에 느끼던 재미는 싹 다 사라져 버렸을 거다. (그리고는 영화를 전공하게 됨)
전문적일 수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없는 일이-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처음 필름사진을 찍기 시작한 카메라는. 자동카메라(엄마 아빠가 어린 시절의 ‘나’를 찍었던-)였다.
셔터스피드 다이얼이나 필름 이송 레버는 돌릴 일이 없는 카메라. 내가 설정할 수 있는 노출값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카메라.
생각해 보면 나의 첫 카메라만큼 솔직하고 확실한 성격의 카메라도 없었다. 자연광 아래. 카메라 녀석이 찍는 대로 맡기면 됐다. 내가 할 일은. 찍고 싶은 피사체를 정하기. 셔터를 누르기. 햇살이 강한 곳에서는 하얗게 날라버리지 않길 기도하기. 그 시절의 자동카메라는 하늘의 응답을 바라는 일만큼이나.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어려웠다.
지금은. 원래 있던 자동카메라 1, 수동카메라 2. 총 세 대의 필름카메라를 가지게 되었다. 가장 애정이 있고 좋아하는 카메라는 첫 수동카메라다. 스무 살 때 사귄 남자친구가 400일 기념선물(1년도 아니고. 400일 기념 선물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지도 않은 이상한 기념숫자다)로 준 것이었는데. 이 카메라를 손에 쥘 때마다, 스무 살의 내가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스무 살이었는데. 어리석게도 그때의 나는 사실을 몰랐다.
첫 번째 수동카메라는, 여러 가지 재미를 선사했다.
셔터스피드의 중요성 이라든지. 반 셔터의 어려움. 포커스의 난해함. 실험적인 필터사용.
무엇보다 다양한 필름을 사용하는 즐거움.
결과물을 도출하는 과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나중에는 암실까지 출입해서 직접 현상하는 뿌듯함까지 누렸으나. 현재의 사진관들은 더 이상 직접 현상하는 곳을 찾기 어렵게 됐다.
그래도 사진을 찍는다. 각 집에 한 대씩은 있는 디지털카메라는 없다. 지금은 없어진 회사.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모델. 놓치면 끝장인 필름카메라를 들고, 점점 가격이 오르고. 점점 구하기 힘들어질 필름을 만진다.
마음먹고 멀리까지 떠나는 출사를 한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가까이 있는 것들을 찍으면서, 뭔가를 해소해 나가긴 한다.
작품사진을 찍거나,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하지는 못한다. 그냥 찍고 싶은 것들을 찍는다.
주목해야 하는 건.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진짜로 오래된 취미라 말할 만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