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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Jul 11. 2024

아프니까 보인다

진짜 아픔이

사소한 사건이었다.

아이들 학교 보낸 뒤 소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뒤 감각 없는 왼쪽다리를 억지로 일으켜서 걸으려다 바닥에 고꾸라졌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지만 엄마와 약속이 잡혀 있기에 운전대를 잡고 친정으로 향했다. 돌아가신 아빠의 상속 유산을 정리하느라 은행을 가야 하는데 동생들에게서 받은 도장, 신분증을 빨리 쓰고 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맙소사, 은행 창구에 의자가 없다.  다리는 코끼리처럼 부어올라 욱신거리는데 창구에 서서 일을 보자 한계점이 왔다. 급기야 일을 다 마친뒤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는데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엑스레이를 보자마자 굳어졌다. 인대가 상했다고 가까운 병원으로 가서 꾸준히 치료받으란다. 


이 다리로 앞으로 어떻게 일상을 감당할까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을 이고 집으로 향했다.  이후부터 남편과 아이들이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동분서주한다.  남편이 가족들 식사, 설거지, 청소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잔심부름을 했다. 모두 안 해본 일들을 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 역시 입으로만 시키는데도 신경이 곤두서고 피곤하다.


엄마가 다리를 못써서 이것저것 사소한 심부름을 시키자 급기야 중3막내가 폭발했다.

"에휴. 엄마가 다리가 아니라 입이 아프면 좋겠어. 잔소리 좀 못하게."


그러면서 말하길  "엄마,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다리를 못쓰셔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이렇게 도와드리며 사셨을 거 아니야?"

"그러게. 외할머니가 그래서 평생 아들 없는 한을 많이 하셨지. 남편도 몸이 불편한데 힘쓰는 아들조차 없어서 많이 힘드셨거든. 엄마는 외할아버지 생각도 많이 난다.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심부름 많이 시킨다고 불평했는데 이제야 많이 미안해지네."


우리 둘은 갑자기 숙연한 표정으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린 때는 다리가 불편해 사소한 잔심부름을 자주 시키시는 아빠가 불만스러워  귀찮다고 톡톡 쏘아붙이기도 많이 했다.

 

이제는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 심부름들을 시키고 있다.

돌이켜 보니 아빠 입장에서는 많이 참고 배려해 주신 것이었는데, 그 사소한 일들을 자꾸 시킨다고 불평하고 쏘아붙였던 나는 참 매정하고 속없는 딸이었다.


요즘에야 인터넷 주문, 택배 등으로 다 해결되지만, 편리한 마트도 흔치 않았던 시절, 시장 본 뒤 이고 지고 한 짐 가득 들고 오셨던 엄마는 또 어떤가.


어디 시장뿐이랴. 집에 형광등이 나가거나, 문고리가 고장 나도, 커튼 하나 다는 것도 온전히 다 엄마의 몫이어서 엄마는 아들 하나 없이 홀로 그 일들을 하시느라 매번 진땀을 빼셨다.

그래서 지금 같이 사는 손주가 그리 든든할 수 없다며 좋아하시는 걸까,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은 더 아픈 사람이란다.'는 이기주 작가의 말처럼 내가 아프고서야 아픈 사람들이 보인다.


그동안 알 수 없는 병으로 다리를 못써서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옆집언니, 다리 골절로 한 달 여 목발을 짚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느라 고생했던 우리 아이들, 지팡이를 짚고 숨을 고르며 힘겹게 걸으셨던 이웃 할아버지....

내가 무심히 지나왔던 얼굴들 위에 한번도 마음으로부터의 위로와 응원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던 차가운 내 모습이 오버랩 됐다.


"엄마, 내가 다리 다쳐 아플 때 엄마가 내 걱정은 안 하고 엄마 힘들게 됐다고 한탄하셨잖아요. 나 그때 많이 섭섭했어요."

응원의 말은커녕 아이들에게 도리어 내가 더 힘들다는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날카로운 비수의 말들을 서슴없이 날렸었다.


진짜 아픈건 인대만이 아님을.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볼 줄 몰랐던  내마음의 눈이 병들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프니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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