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진보 정치의 태동기, 1980년대의 격랑 속에서 움튼 씨앗
1980년대는 한국현대사에서 격동의 시기이자, 훗날 진보정치의 중요한 토대가 형성된 시기였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찾아온 민주화의 열기, 이른바 ‘서울의 봄’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으로 좌절되었다. 뒤이어 발생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폭력의 참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며, 억눌렸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거세게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동춘, 2000) 이렇듯 암울한 현실 속에서 제도권 정치는 제 기능을 상실했고,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목소리는 노동현장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심화되는 빈부격차, 농촌의 피폐화 등 심각한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1980년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으며,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 노동운동의 중요한 분수령으로 기록된다. (박태균, 2005) 당시 노동 운동은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단순한 경제적 요구를 넘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다양한 이념의 흐름이 공존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심으로 한 계급투쟁론,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에서의 점진적개혁론, 그리고 민족해방(NL) 사상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임영일, 2017) 이러한 이념적 논쟁은 이후 진보 정당의 노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대학가 역시 민주화와 사회변혁을 향한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학생들은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고, 사회과학 서적과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탐구하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크게 민족해방(NL) 계열과 민중민주(PD) 계열로 나뉘어 치열한 이념논쟁을 벌였다. NL 계열은 식민지 경험과 분단상황을 강조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통일을 핵심가치로 내세웠고, 반미, 반독재 투쟁을 중심에 두었다. (정해구, 2003) 반면, PD 계열은 계급과 사회변혁을 강조하며 노동자, 농민과의 연대를 중시했다. (김수행, 1989) 이러한 이념적 차이는 운동의 방향과 전략, 그리고 조직 형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훗날 진보정당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표적인 NL 계열 이론가로는 강철이 있으며, 그는 ‘강철서신’ 등을 통해 주체사상을 학생운동에 전파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PD 계열에서는 김민기 등이 노동현장과의 연대를 강조하며 노동자중심의 사회변혁을 주장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노회찬은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회변혁을 모색했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직접 노동현장의 현실을 경험하기 위해 대우자동차 용접공으로 일했다. (서중석, 2011) 그는 1980년대 중반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복협)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노동 운동의 조직화에 힘썼다. 노복협은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복지향상을 위한 활동을 펼쳤고, 이는 훗날 민주노총의 모태가 되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김호기, 2018) 노회찬의 이러한 활동은 노동운동을 넘어, 이후 진보정치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노동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체감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키웠다.
1980년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이라는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폭발하던 시기다. 광주의 상처는 민주화운동의 동력이 되었고,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며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 속에서 노회찬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헌신은 훗날 한국 진보 정당의 역사를 장식하게 된다.
새로운 진보정당의 모색, 이념의 혼돈과 제도권 진출의 시도
1990년대는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시기였다.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전 세계에 거대한 이념적 지진을 일으켰고, 한국사회 역시 이 변화의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198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성장한 진보진영은 기존의 이념적 기반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토록 믿어왔던 사회주의가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 운동의 한켠을 채우던 박 씨의 회고는 당시 진보진영이 느꼈던 혼란과 좌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보진영 내에서는 격렬한 이념 논쟁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운동의 이념적 기반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유효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제 우리는 낡은 이념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당시 진보진영의 한 토론회에서 나왔던 이 발언은 새로운 이념적 방향을 찾고자 했던 이들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 등 다양한 이념들이 진보진영 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는 이후 한국 진보정치의 다원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진보진영의 제도권 진출 시도는 ‘국민승리21’ 창당으로 구체화되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창당된 국민승리21은 권영길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며 진보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했다. 비록 1.2%의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이는 진보정치가 제도권에 진입하려했던 시도로 평가받는다. “비록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우리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제도권에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당시 국민승리21의 당원으로 활동했던 최 씨의 말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시도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의 창당에 함께하며 정책기획과 홍보 등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이 시기부터 특유의 유머와 논리적인 언변을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진보정치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탁월한 면모를 보여줬다. “노회찬은 어려운 정치용어를 쉽게 풀어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당시 노회찬과 가까운 동지의 회상은 그의 대중적 소통능력의 힘을 잘 보여준다.
1990년대 후반에는 IMF 외환위기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이는 대량실업과 경제불평등 심화 등 심각한 사회 문제들을 야기했고, 진보진영은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지지를 확대하려 노력했다. “IMF는 우리 사회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위기를 통해 더욱 강한 사회 안전망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당시 진보진영의 정책담당자의 말은 IMF 위기가 진보진영에 던진 과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고, 이는 이후 한국 진보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90년대는 진보진영에게 이념적 혼란과 새로운 활로모색의 시기였으며, 동시에 제도권 진출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딘 시기였다. 노회찬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진보정치의 제도권 진입을 위한 실무적인 역할과 대중을 상대하는 홍보 활동을 담당하며,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과 성장, 가능성과 한계의 공존
2000년대는 한국 진보정치의 새로운 가능성과 동시에 내재된 한계를 드러낸 10년이었다.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의 창당은 오랜 기간 제도권 밖에 머물러 있던 진보세력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비록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정당 지지율 1%를 넘기면서 법정 보조금을 받는 정당이 된 것은 이후 성장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는 제도권 진입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의미와 더불어, 진보정치가 대중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서복경, 2003)
4년 후,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민주노동당이 비례대표에서만 10석을 획득하며 사상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한 것이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정당이 처음으로 제도권 내에서 유의미한 의석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희연, 2005)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한국사회에 진보정당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국회 내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사회불평등 문제, 노동문제, 환경문제 등 다양한 의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강준만, 2006; 김세균, 2007) 특히 민주노동당은 ‘반미’, ‘평등’, ‘복지’를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한미 FTA 반대, 이라크 파병 반대, 비정규직 문제 해결, 최저임금 인상 등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김세균, 2007; 임혁백, 2008) 이러한 의제들은 당시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사회양극화 심화라는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상환, 2005)
특히 노회찬은 특유의 유머와 논리적인 언변을 활용하여 대중들에게 진보 정치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국회 발언은 항상 화제가 되었으며, 어려운 경제 용어를 쉽게 풀어 설명하고, 권력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중석, 2011) 노회찬의 이러한 대중적 소통 능력은 진보정치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호기, 2018)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앞길은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2005년, 노회찬은 국회에서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건, 일명 ‘삼성 X파일’을 폭로하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검찰,재벌,보수정당으로 이어지는 카르텔의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노회찬은 이 일로 인해 의원직을 상실하는 정치적 시련을 겪게 된다. (김성균, 2006) 이 사건은 진보진영에게는 정의로운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졌지만, 동시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임혁백, 2013)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광역자치단체장 1석(울산광역시장), 기초자치단체장 3석을 포함하여 총 50여 명의 지방의원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중앙정치뿐 아니라 지역 기반을 확대하는 데 성공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당내 NL(민족 해방) 계열과 PD(민중 민주) 계열 간의 이념적 차이는 당 운영에 어려움을 초래했고, 이는 결국 2008년 진보신당과의 분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박명림, 2015; 서복경, 2009) 이러한 분열은 진보진영의 약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됐다. 특히 NL계열의 주체사상에 대한 고수와 PD계열의 대중 노선 강조는 당의 방향성을 놓고 지속적인 갈등을 야기했다. (강준만, 2008)
2000년대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과 성장을 통해 진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준 시기였지만, 동시에 내부 갈등과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시기이기도 했다. 노회찬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진보 정치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당의 분열을 막지 못했다. 그는 ‘삼성 X파일’ 폭로 사건을 통해 실질적인 법치주의의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정치적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2000년대는 한국 진보정치의 중요한 도약과 시련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노회찬은 이 시기 진보정치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긍정적인 영향과 함께 한계 또한 보여주었다.
진보정당의 분열과 재편, 그리고 노회찬의 고군분투
2010년대는 격랑의 연속이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진보진영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았고, 이후에도 크고 작은 분열과 통합이 반복되었다. 마치 사분오열된 전장과 같았다. 이러한 혼돈 속에서 노회찬은 꿋꿋이 진보정치의 재건을 위해 헌신했다. “당이 갈라졌을 때, 정말 많은 동지들이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당시 진보신당 당원으로 활동했던 한 활동가의 회고는 분열의 아픔과 재건의 의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분열의 상처는 깊었지만, 노회찬은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2010년, 노회찬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다시 한번 대중 앞에 섰다. 그러나 당시 야권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민주당과의 합의를 이루지 못하며 고배를 마셔야 했다. “단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당시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관계자의 말은 당시 상황의 어려움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야권 연대의 균열 속에서 노회찬은 자신의 길을 걸어야 했다. 2012년에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노원구 병에 출마하여 당선, 다시 국회에 입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는 분열된 진보진영에 작게나마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일이었다. 긴 터널 끝 희미한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13년, 노회찬은 과거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신상을 밝혔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이른바 ‘삼성 X파일’ 사건의 여파는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을 넘어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화가 났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여전히 건재한데, 그 죄를 고발한 사람만 희생된 것 아닙니까” 당시 그를 지지했던 시민의 말은 당시의 충격과 분노를 생생하게 전한다. 그는 의원직을 잃었지만, 침묵하지 않았다.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 대중과의 소통을 이어가며 재기를 준비했다. 시련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2016년, 노회찬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 출마하여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다시 한번 국회에 복귀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그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는 국회에서 정의당 원내대표직을 맡으며 진보정치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특히 사회불평등 해소, 노동자 권익 보호, 재벌개혁 등 중점적인 의제에 주목하며 활발한 의정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다시 한번 진보정치의 중심에 섰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정국 속에서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의당은 심상정의원을 후보로 내세웠다. 노회찬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심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진보정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역할을 했다. 정권교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는 진보의 가치를 알리는 데 힘썼다.
2010년대는 진보정당의 분열과 재편이 반복되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지만, 동시에 노회찬의 불굴의 의지와 재기를 보여준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보정치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휴먼다큐의 주인공과도 같았다.
진보정치, 새로운 길을 찾아서
2018년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의 갑작스러운 타계는 한국정치, 특히 진보정치계에 깊은 슬픔과 함께 중대한 과제를 남겼다. 그의 부재는 진보정치의 희망을 넘어, 진보진영의 구심점 약화, 대중과의 소통능력 저하, 그리고 향후 노선 설정에서의 분란 등 복합적인 문제들을 야기했다. “그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습니다. 그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 정의당 당직자의 말은 그의 부재가 가져온 상실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진 후 숲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와 같았다. 노회찬 의원 생전, 정의당은 그의 인기에 힘입어 지지율 상승세를 이어갔으나, 그의 부재 이후 지지율은 하락세를 면치 못했고, 이는 2020년 총선에서 의석수 감소와 원내 교섭단체로의 진입이 좌절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의 빈자리가 얼마나 컸는지가 숫자로 입증된 셈이다.
노회찬 의원은 ‘차별금지법 제정’, ‘재벌개혁’, ‘노동시간단축’ 등 구체적인 정책들을 통해 사회불평등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의 부재 이후 이러한 의제들은 추진력을 잃고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차별금지법(평등법)은 여전히 국회에서 계류 했고, 재벌개혁 논의는 이전만큼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노회찬 의원의 부재가 진보진영의 정책추진력 약화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재는 마치 엔진이 고장난 자동차와 같았다.
노회찬 의원은 특유의 유머와 위트를 활용하여 대중과의 효과적인 소통을 이끌어냈지만, 그의 부재 이후 진보 진영은 대중과의 소통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진보정치가 대중의 공감대를 얻고 지지 기반을 확대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진보정당의 한계는 여전히 지지기반의 부실과 대표성 부족, 즉 대중과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는 노회찬 의원의 부재 이후 더욱 두드러졌고, 진보진영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여러 분열과 위기 속에서 기본소득당과 사회민주당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기본소득당의 경우, 핵심 의제인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 형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본소득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또한, 일부 계층에서는 기본소득이 노동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으며, 이는 특히 20대 남성층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더해 강경한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20대 남성층은 물론, 합리적인 성 평등을 지향하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일각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사회민주당 역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념적 지향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현실정치에서의 높은 장벽을 마주했다. 사회민주주의는 복지국가 건설과 사회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이념이지만, 한국사회의 특수한 맥락, 즉 분단 상황, 급격한 경제 성장, 보수적인 정치문화 등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한, 사회민주당은 거대 양당에 비해 조직력과 자금력이 부족하여,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회찬 의원의 빈자리가 여전히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당의 용혜인 의원과 사회민주당의 한창민 의원은 각자의 강점을 활용하여 진보정치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용혜인 의원은 특유의 젊은 감각과 활력으로 청년세대와 소통하며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한창민 의원은 깊이 있는 경험과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 적합한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의 지향점을 통해서 한국 진보정당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룬다. 버니 샌더스는 ‘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라는 명확한 슬로건을 내걸고, 소득불평등 해소, 의료보험확대, 최저임금인상 등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에 초점을 맞춘 정책들을 제시하며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확보했다. 그는 특정 정체성에 국한된 의제에 머무르지 않고, 99%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경제적 어려움에 주목했다. 이러한 접근은 정체성 정치의 구호와 호명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어져, 폭넓은 대중의 공감을 얻었다. 샌더스는 “정체성 정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99%를 포괄하는 정치, 즉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진보정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역시도 샌더스의 사례에서 한국적인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하고 소외된 이들을 호명한 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를 매개로 특정 정체성에 집중하여 더 넓은 범주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어렵다. 청년세대의 주거문제, 불안정한 고용환경, 고령화사회의 문제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주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들을 제시해야 한다. 샌더스의 말처럼, “우리는 99%를 위한 정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의 진보정치는 비로소 대중과의 소통을 이루고, 더욱 공고한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노회찬, 그의 빈자리를 온전히 채울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꿈,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을 이어가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과거의 성과와 한계를 냉정히 되짚어보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진보정당은 숱한 난관을 헤쳐왔다.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고, 불평등과 양극화에 맞서 싸워왔다. 하지만 지금, 진보정당은 고착상황에 직면해 있다. 때로는 대중의 목소리보다 추상적인 이념에 매몰되는 듯하다. 삶의 현장에서 멀어져, 탁상공론에 머무르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한때 같은 이상을 품었던 동지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지금, 미안하면서도 안타깝다. 광장에서 함께 외치던 함성이, 이제는 먼 곳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메아리 같다. 이 글을 쓰는 내내, 함께했던 사람들의 면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들과, 여전히 현장을 지키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이 작은 울림이라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노회찬은 “정치는 희망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정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대중과의 소통이 필연적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삶과 직결된 의제를 중심으로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풀뿌리 조직을 강화하여, 사람들의 삶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마치 오래된 나무가 굳건한 뿌리를 뻗듯, 그래야 튼튼하게 자라날 수 있다.
분열과 갈등은 진보정치의 역사와 함께했다. 마치 뿌리 깊은 나무의 옹이처럼, 때로는 성장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옹이를 도려내고, 새로운 가지를 뻗어야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다양성과 같다. 각자의 개성을 지닌 채, 하나의 숲을 이루듯, 차이 보다는 공통점을 강조하며 더 큰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노회찬의원의 타계는 여전히 슬프지만, 그의 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이제 그 씨앗을 틔우고, 꽃피우고, 열매 맺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의 삶처럼,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함께 희망을 만드는 정치, 그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 글이, 지금은 다른 길을 걷지만, 여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격려와 성찰의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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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010.04.26.). 노회찬 서울시장 출마, 야권연대 '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