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독립운동의 재발견
2025년,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한다. 35년 동안의 암흑기를 거쳐 맞이한 해방의 감격은 여전히 우리 역사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 뒤에는 이념의 대립이라는 또 다른 암흑기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특히, 사회주의 이념을 내걸고 일제에 맞섰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후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식민지 조선, 붉은 깃발 아래 타오른 독립의 열망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식민지 민중들에게 희망을 안겼다. 일본 제국주의의 질곡 아래 신음하던 조선 민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과 균등한 사회 건설을 외치던 사회주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통받던 조선민중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특히 3.1운동 이후, 종교계 민족주의 진영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사회주의는 더욱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대 초, 이동휘, 박진순 등이 주도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설립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김성보,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 이들은 군자금 마련, 무기수송, 정보수집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에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국내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5년 창당된 조선공산당은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일제 헌병대와 경찰의 잦은 검거와 자체적인 내부 분열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공산당은 노동운동, 농민운동, 청년운동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을 통해 민중을 조직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신간회와 같은 민족 협동 전선에 참여하여 민족주의 진영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박시백 작가의 작품 ‘35년’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작품 속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어떻게 민중사이에 스며들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주권을 잃고 착취와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지도자들과 민중의 모습은 사회주의 이념이 당시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태극기와 붉은 깃발 아래, 독립을 외친 사람들
수많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각기 다른 궤적을 그렸지만,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 중 몇몇 주요 인물들의 삶을 통해 당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의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이동휘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인물이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고려공산당 창당을 주도하는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군인으로서의 경험과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의 유행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그의 행적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의 접점을 보여준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핵심 인물로, 해방 이후 남한에서 좌익세력을 이끌었다. 그는 뛰어난 이론가이자 조직가였지만, 해방 후 북으로 넘어간 그는 혼란한 정국 속에서 김일성의 정적제거사업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삶은 해방 이후 이념대립의 격화와 그 속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김산의 삶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통해 서방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국경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펼쳤던 그의 삶은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당시 독립운동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해방 이후, 이념의 덫에 갇힌 역사
1945년의 해방은 비극의 서막을 열었다.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고, 한반도 이남에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는 철저히 부정되고 탄압받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졌고, 조국과 민중을 위했던 헌신은 ‘빨갱이’라는 호칭아래 묻혔다. 이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경석 교수의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가 어떻게 탄압받았는지, 그리고 이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다루며 이를 심도 있게 분석한다. 이 책은 이념의 잣대가 역사를 어떻게 재단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반공정책이 어떻게 사회주의세력을 억압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광복 80주년, 역사의 진실을 향해 나아가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이제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사 청산을 넘어, 미래 세대의 기조를 좌우지할 중요한 사업이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다. 이념의 잣대로 역사를 단죄하는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역사의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한 균형 잡힌 역사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 특히, 해방 이후 냉전 구도 속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역경, 그리고 그들의 헌신을 균형 있게 조명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그 결과를 학계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야 한다. 학술 대회 개최, 관련 서적 출판, 다큐멘터리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와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
더불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기념 사업을 확대하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념관 건립, 추모 행사 개최 등을 통해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후세에 그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광복 80주년, 우리는 역사 앞에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색안경을 쓰고 바라본 세상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낳는다. 이념의 색안경을 벗고, 매일매일을 비루한 일상과 씨름해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 관계의 개선점을 모색해야 한다. 과거의 아픔을 직시하고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길이다. 또한,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포용하고 함께 논의하는 성숙한 자세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지성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문을 여는 것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지성을 미래세대에게 전달하는 길이 될 것이다.
* 참고자료
김성보,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박찬승, ‘한국 근현대사’
강만길, ‘한국 분단사’
조동걸, ‘한국 독립운동사’
서중석, ‘한국 현대사’
한겨레21 관련 기사 (사회주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 검색)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관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