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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장 잘 짓밟는다

1948년 제헌헌법부터 2024년 계엄까지

by 백재민 작가

2024년 12월 3일 밤, 나는 사회문제론 강의를 듣고 돌아와 임승수선생님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비상계엄소식이 떴다. 대통령이 근거로 댄 것은 헌법 제77조였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그런데 국가비상사태가 맞긴 한 건지 의아하다. 고작 1% 내외의 우세로 선출된 권력자가 같은 문서에서 자기행위를 정당화하는 조항을 꺼내드는 동안, 그 문서의 다른조항이 보장하는 가치를 짓밟으려 했다. 법조문이 이렇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충격이기도 했다.


계엄포고령을 접하고서야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역사책에서나 봤던 문장이 2024년에 내 모니터화면위에 떠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이게 왠 뜬구름잡는 소리고" 싶었다. 그날밤 이후로 나는 헌법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기본법을 읽었다. 이 글은 그 과정에서 얻은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논지를 전개하기에 앞서 한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이 글이 헌법학논문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나는 법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헌법조문을 해석할 식견이 없다. 식견이 짧은 나로서는 헌법학자처럼 조문을 정밀하게 분석할 깜냥은 안되지만, 시민의 눈으로 우리헌법이 왜 이런 맥락을 가지고 있나하는 탐구는 할 수 있다. 그래서 몇자 쓴다.


왜 독일이었는지부터 이야기하자. 독일도 우리처럼 민주주의가 안에서부터 무너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밖의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에서 선출된 권력에 의해서 말이다. 윤석열이 히틀러와 비준될 인물은 아니지만, 굳이 언급을 하자면, 히틀러는 선거로 집권했다. 합법적절차를 밟아 독재권력을 구축했다. 투표로 뽑힌 지도자가 선민의식으로 가득했던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했다. 그 뿐인가 대규모로 학살까지했다. 유럽에서의 유대인집단은 사회에 녹아들지 않는다고, 선민의식으로 가득차, 눈에 띈다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난 다음 경제위기가 겹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가운데 소수자 집단이었던 유대인이 희생양으로 떠오른다. 다수결로 선출된 권력이 파괴하지 말아야할 무언가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독일은 몸으로 겪었다. 그래서 독일기본법(Grundgesetz, 1949)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존엄은 불가침이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다."


조항은 헌법개정으로도 바꿀 수 없다. 다수결로도, 의회결의로도, 심지어 헌법개정절차를 거쳐도 건드릴 수 없는 영구조항이다.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원천차단하는 장치인 셈이다.

각주

독일기본법

1949년 5월 23일 제정. 나치즘의 폐허위에서 만들어진 서독의 헌법으로, 통일이후에도 통일독일의 헌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이 히틀러에 의해 무력화된 역사적경험을 반영하여, 기본권보장과 민주주의보호에 특히 강한장치를 두고 있다. 제1조(인간존엄성)와 제20조(민주적·사회적 연방국가)는 헌법개정으로도 변경할 수 없는 이른바 '영구조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걸 처음 알았을 때 꽤 오래 멍하니 앉아있었다. 국민투표로도 못 바꾸는 헌법조항이 있다니. 우리한테는 그런게 없지않나. 아무리 국회의원 3분의2가 모이고, 국민투표를 거치더라도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가치가 헌법에 박혀있다는 것. 그 발상자체가 낯설었다. 그런데 왜 독일은 그런장치를 만들었는가를 알게되면 이질적이지 않다.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저지른 만행이 있기때문이다. 다수결로 전쟁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했기때문이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영구조항도 없었을 것이다. 대가가 너무 컸다.


독일기본법 제20조도 짚어봐야한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연방국가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앞선 칼럼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다루면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독일에서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의무다. 헌법에서부터 회불평등을 조정해야 할 의무를 진 국가라는 뜻이다. 국가가 안해주면 위헌인 것이다. 한국우익이 복지를 '포퓰리즘'과 동의어로 취급하고, 복지확대를 나라망치는 짓이라 선동할 때, 독일에서는 그 복지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근로의 의무와 시장에서 소외된 국민에 대한 복리후생이 명시되어 있지만 이 차이가 작지않다.


이 원리를 근거로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수십년에 걸쳐 구체적인 판결을 내렸다. 기초생활보장은 인간존엄에서 직접 나오는 권리라는 판결. 망명신청자에게도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야한다는 판결. 노동조합은 경영참여권을 법으로 획득했고, 사회민주당은 집권을 통해 그 원리를 정책으로 도입했다. 한마디로 헌법문장이 판결이 되고, 판결이 법률이 되고, 법률이 제도가 되고, 제도가 삶의 조건이 되는 긴 사슬이 만들어진 것이다. 헌법이 살아있는 규범이 된 것은 헌법문자에서 초월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지 않나. 그 문자를 현실로 만들려는 진영간의 경쟁 누적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헌법의 가치를 두고 실현하려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

사실,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의 수준높은 보편복지는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2차대전 직후 폐허가 된 서유럽에 마셜플랜으로 130억달러(현재가치로 약 1,500억달러)를 쏟아부은 것은 미국이었다. 냉전기간 내내 NATO라는 안보우산을 펼쳐준 것도 미국이었다. 유럽국가들이 국방비를 GDP의 2%이하로 억제하면서 그 여유분을 복지에 투입할 수 있었던 조건, 그 조건의 상당부분을 미국의 군사력과 재정이 떠받쳤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독일이 사회국가원리를 수십년에 걸쳐 판결과 제도로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도, 안보걱정을 미국에 상당부분 외주맡긴 덕이 컸다. 그런데 그 미국은 정작 자국민에게 전국민의료보험 하나 제공하지 못하는 나라다. 유럽의 복지를 가능케 한 미국이, 정작 자국내에서는 복지를 사회주의로 취급하는 아이러니가 반복되어 왔다. 이 구조를 모른 채 독일모델을 이상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않다. "반골의 유산"에서도 썼듯이 평화를 전제로 설계된 복지국가가 전쟁과 지정학적불안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최근 몇년간 유럽에서 실제로 나타나고있다.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독일은 GDP 대비 2%이상의 국방비를 약속했고, 그 돈은 어딘가에서 빠져나와야한다. 복지예산이 깎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우산이 걷히면 유럽복지국가의 토대가 흔들린다는 현실이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다. 우리 역시 미국의 안보우산아래 있고, 그 우산의 가격이 올라가는 중이니까.


자, 이 독일기본법을 배경으로 놓고 한국헌법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뜻밖의 것들이 보인다.


한국헌법은 1948년 7월 17일에 만들어졌다.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지 3년, 남북분단이 굳어지던 그 시점에 제헌헌법이 제정됐다. 나는 1948년 헌법이 상당히 보수적인 문서일 거라고 짐작했다. 이승만이 주도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읽어보니 달랐다. 제헌헌법의 제84조를 보자.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광물과 중요지하자원은 국유로 한다는 조항도 있었고, 중요기업의 국유화가능성도 열어놨다.


유진오
각주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법학자이자 정치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헌법학을 연구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핵심인물이다. 독일바이마르헌법의 사회권조항과 경제민주주의원리를 한국헌법에 반영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나, 유신체제하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맡는 등 권위주의정권에 협력한 행적도 남겼다.


헌법기초에 관여한 유진오가 독일바이마르헌법의 경제민주주의조항을 적극 참조한 결과였다. 한국최초의 헌법은 자유시장만능주의를 답습하는 헌법으로서 제정되지 않았다. 사회의 존재를 인정하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담았다. 일제와 싸우던 독립운동가들이 제헌의회에 대거 진입했고, 이 제헌의회의 의원들은 일제와의 투쟁에서 국민한사람 한사람이 균형있게 발전하는 사회를 꿈꿨다. 불균등, 불평등은 곧 사회혼란과 질서가 무너진다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그 혼란이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나는 좀 멈칫했다. 1948년에 이미 그런 내용이 들어가있었다고? 그러면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뭐란 말인가. (유진오라는 인물도 참 아이러니한게, 바이마르헌법의 이상을 한국에 심어놓고 나서 정작 본인은 유신체제에 협력했다. 이상을 심은 사람이 그 이상을 짓밟는 권력에 복무한 셈이니, 이 글의 제목과도 닮아있는 아이러니다.)


이승만은 헌법을 만든 지 4년 뒤인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국회가 간선제로 자기를 재선시키지 않을거라는 걸 알았기에, 경찰과 관제데모대를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위협하고 직선제개헌을 밀어붙였다. 헌법을 만든 의회를 짓누르고 헌법을 고쳐서 권력을 연장한 첫번째 사례다. 4년밖에 안걸렸다.

제헌의회에서 발언 중인 이승만

1954년에는 더했다. 사사오입개헌이 그렇다.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됐는데, 반올림논리를 끌어다대서 가결로 뒤집었다. 헌법을 수학으로 농락한거다. (계산기하나 들이밀면 끝날 일을 갖고 나라가 뒤집어졌으니, 허탈하기도하다) 초대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없앤다는 조항이 이때 들어갔다. 제헌헌법에 담겨있던 경제민주주의조항들은 이 과정에서 하나둘 힘을 잃어갔다.


박정희는 아예 다른수를 썼다. 1972년 유신헌법은 독재자가 헌법자체를 독재를 위해 대놓고 바꿔버린 사례다.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고, 국회의원 3분의1을 대통령이 지명하고, 대통령임기를 6년으로 늘리면서 연임제한도 없앴다. 긴급조치를 발동하면 영장없이 체포할 수 있었다. 헌법에 민주공화국이라는 문자는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그 문자위에서 실제로 작동한 것은 1인독재체제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박정희정권이 수출주도경제성장을 위해 특정기업들을 선별해 금융특혜와 세제혜택을 쏟아부었고, 이것이 오늘날 재벌체제의 뿌리가 됐다. 헌법에 적힌 경제민주주의는 짓밟으면서, 정경유착이라는 기형적경제구조는 열심히 만들어낸 셈이다.


여기서 독일과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독일은 히틀러의 경험이후 "다수결로도 건드릴 수 없는 선"을 헌법에 박아놓았다. 한국은 그런장치없이 출발했고, 그 빈자리를 권력자들이 정확히 파고들었다. 헌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헌법의 빈틈을 가장 잘 이용했다. 유진오가 바이마르헌법을 참조하면서도, 바이마르헌법이 무너진 이유 즉, 영구조항의 부재, 비상사태를 가장한 권한의 남용까지는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셈이다(좀 더 심오한 원리가 있겠지만 필자는 헌법학 전문가가 아니기에..이렇게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독일은 바이마르의 실패에서 배워 기본법을 만들었는데 한국은 바이마르의 이상만 가져오고 실패의 교훈은 빠뜨렸다는 점이다.

의회에서 권력을 본인에게 집중하라 연설 중인 히틀러

이상과 현실사이의 간극은 이렇게 헌법이 가진 가능성을 배타적인 거대서사아래 둘 때 벌어진다. 이게 건국초기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의 논리도, 박정희의 논리도 비슷한 전시국가체제의 거대서사 아래 가능했다. 헌법에는 사회정의라고 적혀있는데 현실에서는 독재자가 그 헌법을 주물럭거리고 있었으니까. 그 간극이 좁혀진 것은 1987년 6월항쟁에 의해서였다. 국민들이 거리에서 요구하고 쟁취한 현행헌법에서 헌법의 가능성에 희망을 느꼈다. 당대 전두환이 누리던 헌법내용의 반대되는 측면들,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직선제, 연임을 가장한 영구집권을 차단하는 5년단임, 국회의 국정감사권부활, 헌법재판소신설 조항요구는 그 당시의 이상이기도 했다.


1987년 헌법에도 사회권조항이 살아있다. 제34조는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119조를 보자. 이 조항은 내가 글을 쓰면서 몇번이고 다시 읽는 조항이다.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조항이 헌법에 있다. 신자유주의를 신앙처럼 떠받드는 정치세력들이 헌법의 이름으로 복지축소와 노동유연화를 정당화할 때, 그들이 실현해야하는 헌법의 가치 자체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한다. 10대 재벌의 매출이 GDP의 80%를 넘기는 나라에서,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라는 헌법의 명령이 제대로 작동한 적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다. 이전에 "헌법대로 합시다"라는 글에서 쓴 적이 있는데. 헌법이 그들편이 아니라고. 정확히 말하면 헌법이 지향하는 법 철학이 위를 지탱하는 아래에게 유리하게 실현된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규제완화와 부자감세를 외치는 세력이 정작 헌법을 읽어본 적이나 있는건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몇가지 의문이 남는다. 문자상으로 비슷한 원리를 담고있는 독일기본법과 한국헌법이 왜 이렇게 다른현실을 만들었는가.


차이는 조문에 있지않았다. 그 조문을 살아있는 현실로 만들어낸 정치에 있다. 앞서 말했듯 독일에서는 헌법문장이 판결-법률-제도-삶의조건이라는 긴 사슬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어땠나. 경제민주화조항은 선거때마다 소환됐다가 선거가 끝나면 서랍속으로 들어갔다. 헌법재판소는 사회권조항을 구체화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입법부는 헌법이 명령하는 최소한의 사회보장도 오랫동안 미뤘다. 그러는동안 OECD 최고수준의 노인빈곤율은 38.9%를 찍었고, 청년자살률은 세계최상위권을 맴돌았다. 헌법에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라고 적혀있는 나라에서 말이다.


헌법 제34조 5항은 노령으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을 국가가 보호해야한다고 명시한다. 그런데 새벽골목에서 리어카를 끄는 어르신의 생활상을 보면 그냥 종잇장이다. 헌법조항이 고스란히 담긴 종이가 고물상저울에 달린 박스종잇장보다 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알고있다. 그 어르신들이 헌법에는 일절 관심없는 국민의 힘과 '자유시장'만을 입에 담는 정치인을 좋아한단걸 말이다. 이전에 언급했듯 과거 전시국가체제에서 굳혀진 현상이다. 모두, 생산성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내가 몸담은 진보는 "생산성을 언급하는 건, 지배자의 관점에서 나오는 논리고, 시민개인의 입장에서 정치를 다뤄야한다"고 말한다. 안타깝지만 아직까지는 그 시민개인이 지배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마찬가지로 종전되지 않은 분단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진보라도 주권자의 눈높이에서 말해야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북유럽국가 중에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원칙으로 저임금을 주는 저생산성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는데, 한국은 노인의 무임노동으로 기업의 원가를 절감해주고있다. 평등도 없고, 효율도 없다. 오직 기업의 이윤만 극대화된다. 그런데 말단에서 시스템의 폐해를 한 몸으로 입는 어르신들이, 그 폐해를 조장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한다. 진보 역시 이 모순을 모르는게 아니다. "시장원리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새벽에 리어카끄는 할머니한테 와닿을 리가 없지않나. 그 할머니에게 중요한 건 오늘 폐지값이 얼마냐는것이고, 아들이 군에서 무사히 제대했느냐는것이고, 북한의 도발이 이웃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분단국가에서 안보불안은 생활불안과 뒤섞여 있다. 그 감각 위에서 보수정치인들의 '자유'와 '안보' 수사가 먹히는거다.


여기서 진보는 "그건 허위의식이다, 어르신들이 속고있는거다"라고 말할 수 없다. 주권자를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태도가 진보의 가장 큰 적이다. 주권자의 눈높이에 서지못하는 헌법은, 아무리 아름다운 조문을 담고있어도 죽은텍스트에 가깝지 않나. 진보를 지지해줄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설정하는 타겟팅이라해도 말은 같다.

진보는 그 타겟팅 범위가 너무 좁다.


결국 헌법이 그 실효성을 가지는 데는 그 문자를 시민의 일상을 지탱하는 정치에 있다. 주권자를 계몽하려는 정치 대신 주권자의 눈높이에서 헌법의 가치를 실현해 보일 때라야 헌법이 기존 하위법 상위에 위치한 최고법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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