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보험법,
그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

복지병이라는 단어가 가리운 것

by 백재민 작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법제와 실천] 수업을 듣고 있다. 고용보험법을 주제로 발표를 맡았다. 교재는 고용보험법 제1조의 목적을 이렇게 소개한다.


"실업의 예방, 고용의 촉진 및 근로자 등의 직업능력의 개발과 향상을 꾀하고, 국가의 직업지도와 직업소개 기능을 강화하며, 근로자 등이 실업한 경우에 생활에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근로자 등의 생활안정과 구직활동을 촉진함으로써 경제·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령을 설명하는 소개문이 깔끔하다. 교과서적 분류에 따르면 이 법은 전통적 실업보험(소극적·사후적)에서 고용보험(적극적·사전적)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징한다고도 쓰여있다. 당연하게도 이 깔끔한 소개문 뒤에 어떤 삶들이 놓여 있는지를 교과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사회복지법제와 실천] 교재

2023년 여름, 자퇴했던 대학에서 선배로 만났던 형과 커피한잔했다. 형은 하청에서 1년차 정도 근무했나보다. 커피를 마시다가 노조이야기가 나왔다. 노조이야기 중에 형이 한말이 뼈아팠다. "노조는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배가 일하는 곳은 포스코 협력업체였다. 3교대에 주말출근이 일상이었다.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긴 했다. 그런데 선배는 고용보험이 자신에게 어떤 이점을 주는지 몰랐다. 실업급여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고용보험법 제4조가 규정하는 4대 사업, 즉 고용안정사업, 직업능력개발사업, 실업급여, 모성보호급여(육아휴직급여 등) 중에서 선배가 인지하는 건 실업급여 하나뿐이었다. 고용안정조항이 경기변동이나 산업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업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사업이라는 것도, 직업능력개발조항이 노동자의 직업활동 전 기간에 걸쳐 역량을 개발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라는 것도 선배관심 밖이었다. 선배에게 고용보험은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공제항목 중 하나일 뿐이었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업무중 다쳤을 때 자신의 생계를 보장한다는 정도가 다였다. 나 역시 그정도만 인지하고 있었으니, 법령이 가지는 원칙이 현장에서는 그닥 효용성이 없다는 뜻도 되겠다.


생각해보면 고용보험료는 매달 월급에서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 보험료가 나에게 어떤 권리를 만들어주는지를 사업주도, 국가도, 노조도 알려주지 않는다. 알려줘도 써먹을 방법이 없다. "당신은 이 돈을 냄으로써 고용안정사업, 직업능력개발사업, 모성보호급여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됩니다"라는 설명이 근로계약서 어딘가에 있겠지. 직장생활이 그렇지 않나. 알고 있어도 아는체 하거나 튀면 안되고, 튀면 안되니 내 권리를 요구하기 어렵다. 특히나 5인미만 사업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선배가 고용보험을 '공제항목'으로만 인식하는 건 그런 맥락에서다. 알아도 나만 괴롭고, 요구할 수 없으니까. 이런 이유로 우리는 "보험료를 내는 주체"가 아니라 "공제당하는 객체"로 위치한다.


보험료구조를 짚고 가자. 실업급여 보험료는 근로자와 사업주가 각각 임금총액의 0.9%씩, 절반을 나눠 부담한다. 그런데 고용안정사업과 직업능력개발사업의 보험료는 사업주가 전액 부담한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0.25%에서 0.85%까지 부담한다.


이 보험료 부담구조가 갖는 정치적 함의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업주가 고용안정사업과 직업능력개발사업의 보험료를 전액 부담한다는 건, 뒤집어보면 그 사업의 실질적 운영방향을 사업주의 이해관계가 좌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직업능력개발사업의 훈련프로그램이 "현장에서 실제로 필요한 기술"을 배우는 곳이라기 보다 "프로그램 이수자체가 목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더 나은 역량을 갖춰서 더나은 조건의 다른회사로 이직하는 것보다, 지금 자리에서 최소한의 기능만 수행하며 붙어있는 게 이득이다. 보험료를 내는 사람의 이해관계와 그 보험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할 사람의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스웨덴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노동자를 더 나은 일자리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면, 한국의 직업능력개발사업은 "아예 주어지지 않거나, 노동자를 지금 자리에 묶어두려는 사업자에게 유리한 사업"에 가깝다. 같은 이름의 제도가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이유가 보험료부담구조와 우리나라 고용보험법이 탄생한 배경에 있다.


시점을 조금 뒤로 돌려보자.


고용보험법이 제정된 1993년은 김영삼정부가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해다. 문민정부가 세계화를 국정기조로 내걸었고,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공식적으로 정책목표에 올랐다. 그런데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든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해고를 쉽게 만든다는 뜻이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필연적으로 노동의 희생을 수반할 것이라는 사실이 1993년에 고용보험법의 제정을 촉진한 배경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확장하려는 의지에서 나왔다기보다 노동시장유연화라는 자본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그 충격을 완충하기 위한 장치로 설계된 것이다. 그 이전인 1992년에 '고용보험연구기획단'이 설치됐고, 1993년 4월에는 신노총과 경총의 중앙노사합의에서 "고용보험 조기실시"를 대정부 건의사항으로 채택했다. 언뜻보기에 노사가 합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합의의 실질은 자본 측의 구조조정 수요에 노동 측이 방어적으로 대응한 것에 가깝다.

취임식에서 선서중인 김영삼

1995년 시행 당시 적용범위는 30인이상 사업장이었다. 고용안정·직업능력개발사업은 70인 이상 사업장에만 적용됐다. 보험료율도 미미했다. 실업급여 보험료는 노사가 임금총액의 0.3%씩 분담했고, 고용안정사업은 0.2%, 직업능력개발사업은 기업규모별로 0.1%에서 0.5% 수준이었다.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그러니까 한국노동시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애초에 이 법령이 말하는 울타리 바깥에 있었다. 다행히도 점진적으로 적용범위를 넓혀갔다. 그런데 그 '점진'의 시간 동안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삶은 교과서 어디에도 없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다. 그제야 고용보험의 적용이 급격히 확대됐다. 1998년에 1인 이상 전 사업장으로 확대된다. 위기 앞에서 국가가 부랴부랴 안전망을 펼친 것이다. 시행초기인 1997년에 48,677명이던 실업급여 수급자가 1998년에 412,600명으로 폭증했고, 2009년에는 1,301,132명까지 늘어났다. 위기가 올 때마다 수급자가 급증하는 패턴이다. 안타깝게도 고용보험은 위기를 수습하는데 그치고 예방하는 방화벽 역할은 하지 못했다.


이후의 연혁도 따져보자. 2001년에 고용보험법 개정으로 육아휴직급여와 출산휴가급여가 편입됐다. 모성보호가 고용보험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의미있는 진전이었다. 2004년에는 일용근로자, 주 15시간 이상 시간제근로자 등 비정규직에게까지 적용이 확대됐다. 2019년에는 실업급여 지급수준이 퇴직 전 평균임금의 50%에서 60%로 인상됐고, 정해진 급여일수도 90~240일에서 120~270일로 늘어났다. 그리고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예술인,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플랫폼노동자에게 단계적으로 적용이 확대됐다.


뜬금없어 보인다만, 제헌헌법을 살펴보자. 고용보험법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인 1948년, 제헌헌법 제84조에는 이미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1948년에 이미 사회정의와 균형있는 발전을 이야기했는데, 그로부터 45년이 지나서야 실업에 대한 최소한의 보험제도가 만들어졌다. 그것도 노동자의 권리로서가 아니라 시장유연화의 부산물로서. 당시에는 모두가 못먹고 못살던 시기였으니 제헌헌법이 가지는 가치를 실현하기 어려웠다. 알고는 있지만 괘씸한 지점이 있는데, 헌법이 말하는 가치와 실제시행 사이에 45년의 간극을 독재자들이 벌여 왔다는 사실에 있다.


교과서적 분류로 들어가면 고용보험법은 사회보험의 영역에 속한다. 사회보험법의 운영원리, 즉 사회연대의 원칙과 사회국가원리가 고용보험법의 이론적 기초다. 사회연대원리란 사회구성원이 공동으로 위험을 분담한다는 원칙이고, 사회국가원리란 국가가 사회불평등을 조정할 의무를 진다는 원칙이다. 교과서는 이 두 원리가 헌법전문의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 이념에서 도출된다고 서술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고용보험이 이 원리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용보험의 4대 사업을 좀 더 들여다보자. 교과서가 잘 정리해놨으니 따라가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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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출신 글쟁이.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는 이단아. 평론과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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