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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Feb 26. 2024

화려한 빌딩숲이 싫증 난다면 성곽마을.

혜화문 밖 성곽마을, 369마을 여행  


지난 1월 종영한 ENA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멜로드라마입니다. 어린 시절 청력을 잃은 후 그림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화가 차진우(정우성 분)와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무명 배우 정모은(신현빈 분)의 사랑 이야기이지요. 이 이야기가 특별한 것은 주인공 차진우를 통해 청각장애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험한 적 없는 낯선 세계로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여주인공 정모은의 편견 없는 마음도 내 맘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자극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없는 이 고요한 드라마가 눈길을 사로잡은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중년이 되어도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손색없는 정우성의 비주얼 때문도 아니고, 단 한 마디의 대사 없이 수어와 표정만으로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하는 그의 연기력 때문만도 아닙니다. 내가 드라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장소와 배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지요.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배경으로 등장한 한양도성 낙산구간의 성곽마을은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서울의 도심과 달리 아늑하고 고요합니다.  


많은 장면들이 서울의 가장 도심인 한양도성 성곽의 안팎을 오가며 촬영되었습니다. 특히 남주인공 차진우의 집이자 작업실이 등장하는 장면에는 어김없이 성돌이 촘촘히 맞물린 한양도성 성벽이 등장합니다. 축성 시기에 따라 돌의 크기나 형태가 다른 것도 눈에 띕니다. 성벽에 기댄 것 같기도 하고 성벽과 사이좋게 마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작고 소박한 차진우의 집이 있는 곳은 한양도성 혜화문 밖 성곽마을인 성북구 삼선동 ‘369마을’입니다.                                             

  

여주인공 정모은이 성벽을 따라 차진우의 집으로 가는 길은 셀렘으로 가득합니다. 초가삼간을 닮은 이 단촐한 집이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지요.
삼선동 6구역에서 369라는 이름을 따온 369마을의 카페가 차진우의 집입니다. 북한산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신선계의 집이지만 도시재생 사업 전에는 어느 가난한 이의 보금자리였겠지요


지엄한 임금이 사는 도성 안과 바깥을 구분 짓는 것이 성벽입니다.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할 뿐 아니라 수도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부여하고 유사시 외적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지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주인공의 세상은 성벽으로 가로막힌 세상과 닮았습니다. 청각장애인인 그에게 있어 성벽 바깥세상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구분되어 버리고,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폭력적인 시선이 존재하는 단절된 세계니까요. 하지만 구분 짓고 단절하는 성벽은 의지할 곳 없는 이 외로운 남자가 기대는 것을 허락합니다. 견고하고 무뚝뚝해 다정할 것도 없지만 세월의 아픔을 견뎌온 방식대로 덤덤하게 그의 배경이 되어줍니다. 심지어 세상의 폭력으로부터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600년간의 긴 풍파를 겪어왔으니 성벽의 시간은 드라마 속의 시간처럼 느리고도 느립니다. 그리고는 숨 가쁘게 달려가는 사람들을 토닥입니다. 급할 것 없다고, 쉬어가도 문제없다고.




한양도성 낙산구간의 성곽마을, 369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한양도성의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에서 시작됩니다. 조선시대에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문으로 사용된 혜화문은 1928년에는 문루가, 1938년에는 전찻길을 내면서 석축마저 완전히 헐렸지요. 1994년 복원했지만 지형이 완전히 달라져 원래 위치보다 10여 m 뒤로 물러났습니다. 혜화문에서 곧장 대로(창경궁로)를 건너 성곽길로 진입해도 되지만, 경사가 가팔라 힘들더라도 마을을 관통해 성곽길로 들어서야 369마을을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낙산구간 성곽마을 답사는 혜화문에서 시작합니다. 혜화문 아래, 간판이 걍 '국시집'인 국숫집에서 칼국수 한 그릇 뚝딱 비웁니다. 전직대통령과 정계인사들의 맛집이지요~^^


마을 어르신이 만든 솟대가 반기는 369마을의 봄가을은 마을 해설체험과 예술제 등으로 분주해집니다. 마을 사랑방에서는 예약을 통해 어머니밥상을 맛볼 수 있지요~


쉼이 있는 한양도성-369마을 해설체험 예약 (5,6,9,10월)

369 어머니밥상 예약(연중 월, 수, 목 11:30~13:30)




18.6km에 달하는 한양도성과 성벽을 따라 걷는 성곽길은 이제 어엿한 서울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잘 정비된 덕분에 가벼운 등산이나 산책로로 각광받고 있지요. 하지만 성벽에 연접한 성곽마을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성곽마을은 한양도성의 성곽을 따라 안팎으로 자연스럽게 옹기종기 형성된 주거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6·25 전쟁 이후 몰려든 피난민과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도심 개발에 떠밀린 서민, 생계를 위해 서울로 온 사람들이 정착한 구릉지대이지요. 그래서 교통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마을이 체계적으로 형성되지 못해 좁은 골목, 무허가 주택과 노후화된 건물 등으로 주거지로써는 외면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연유 때문에 성곽마을이 보존될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요? 다행 정도가 아니라 근대 문화유산에 목마른 서울 도심에 축복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옹기종기 형성된 성곽마을은 근대 생활문화유산으로 주목받고 있지요~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의 눈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적인 도시 안에 역사와 전통을 껴안고 보존해 나가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렇긴 해도 중세의 성벽과 교회, 근대의 집과 골목을 구시가 안에 고스란히 지켜내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재형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유럽의 도시들에 비해 우리의 역사문화유산이 풍부하다거나 제대로 보존되었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같은 역사의 큰 소용돌이를 겪으며 역사문화유산은 소실·변형되었고,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내느라 그 중요성은 뒷전이었기 때문이지요. 그중에서도 근대의 주거지역과 골목, 마을은 이제 서울 도심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조선과 현재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근대의 생활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까지 진행 중인 생생한 삶의 터전이라는 점에서 성곽마을의 존재는 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면받아오던 성곽마을은 최근 20여 년 동안 한양도성의 복원에 발맞추어 빠르게 변화했습니다. 가난의 상징이었고 규제와 철거의 대상이었던 성곽마을은 이제 재개발이 아닌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자 생생한 삶의 공간이며 정겨운 감성의 공간으로 재탄생 중이지요.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마을 사랑방, 공방, 카페 등을 운영하고 주택개량, 골목길 정비, 도시가스 설비 등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활동을 활발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외면받던 성곽마을은 이제 드라마의 배경으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변신하며 주목받고 있지요. 골목에서 자라난 중장년층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 어린 공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에만 익숙한 청년 세대에는 새롭고도 신선한 장소로 사랑받고 있으니까요.

      

한양도성 안팎으로 9개 권역, 22개의 성곽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서울시 제공)


현재 한양도성 안팎에 22개의 성곽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흥인지문에서 낙산으로 연결되는 창신동에서부터 이화마을, 삼선동의 369마을과 장수마을, 성북동의 북정마을, 창의문 밖 부암동, 인왕산이 사직로와 만나는 행촌동, 사직동 등이 그것이지요. 답사의 농한기인 겨울을 벗어나 따스한 봄날이 오면 한양도성 대표 성곽마을들을 저와 함께 천천히 걸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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