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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Apr 12. 2024

<몽유도원도>의 실사판이 부암동이라고요?

봄이 가기 전에, 창의문 밖 성곽마을 부암동 여행 1


한양도성의 북쪽 소문(北小門)은 창의문(彰義門)입니다. 임란 때 불탄 문루를 1740년(영조 16)에 재건해 한양도성 4대문과 4소문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문이지요. 이 문을 통해 개성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이곳이 개성의 자하동 계곡처럼 맑고 깊다며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자하동을 본 적 없으니 상상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석이 없다면 이곳으로 물이 흘러내렸다는 사실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지형이 변했습니다. 오늘은 이 창의문 밖으로 나가 도성 밖 성곽마을인 부암동 답사를 시작합니다!


어느 늦은 봄날 오후 6시. 보드라운 햇살과 고즈넉함이 감싸는 창의문은 시공을 초월한 느낌으로 내게 감동을 주었지요.


부암동은 예로부터 경관이 빼어나기로 이름난 마을입니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양팔처럼 두르고 있어 골짜기마다 흘러내린 맑은 물이 ‘무계동(武溪洞)’, ‘삼계동(三溪洞)’, ‘백석동천(白石洞天)’ 같은 최고의 풍광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동(洞)’은 지금의 행정구역에 붙이는 마을의 의미가 아닌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 물길은 도성 밖 세검정 계곡을 따라 홍제천으로 이어지거나, 도성 안을 가로질러 청계천에 이르고, 이는 다시 오간수문을 통과해 중랑천을 만나 한강과 합쳐졌습니다.      


부암동은 청와대와 가까워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급격한 도시 개발을 피해 갔습니다. 1968년 1·21 사태(청와대 기습 미수사건)로 인왕과 북악산의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고, 일반에 다시 개방된 것은 불과 1993년과 2007년(2022년 완전 개방)의 일이니까요. 오랫동안 군사보호구역,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있던 탓에 서울 도심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자연경관과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마을이 바로 부암동입니다.


게다가 곳곳에 흥미진진한 역사이야기와 인물의 흔적이 남아 있고 환기미술관, 서울미술관, 자하미술관, 유금와당박물관, 윤동주문학관과 같은 문화예술 공간이 넘쳐나다 보니 이보다 더 운치와 품격 넘치는 동네를 만나기란 쉽지 않지요. 최근에는 주변 산지와 연계한 다양한 산책 코스가 개발되고 아담하고 개성 넘치는 카페, 베이커리, 음식점들이 줄줄이 들어서 팍팍한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부암동은 보석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마을에는 2m 높이의 특별한 바위 하나가 있었습니다. 다른 돌을 가지고 그 바위 표면에 자기 나이만큼 문지르고 손을 뗐을 때 돌이 붙어있으면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어 부침바위(付岩)라 불렀지요. 부암동(付岩洞)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하지만 길을 낼 때 사라져 버려 지금은 없어요. 부암경로당 앞에 표지석만 남아 있을 뿐이지요. 부암이 없는 부암동입니다.      


자하문로를 내며 부침바위(부암)는 사라져버렸고  동네 이름으로만 남았지요.


부암동 답사 여행은 창의문(彰義門) 밖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시작합니다. 부암동 가는 대부분의 시내버스가 이곳을 지나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의 팁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인왕산 자락인 서편과 북악산 자락인 동편으로 나누어 보기를 추천합니다. 먼저 서편인 인왕산 자락 '무계동'을 찾아갑니다. 최근에 '무계정사길'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지요. 


부암동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인왕산과 북악산 양편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왼) 부암동 주민센터까지 많은 버스들이 지나니 이를 이용하면 편리하지요.(오)




주민센터를 끼고 인왕산 방면으로 천천히 오르다 보면 5분도 못 가 삼거리가 나타나고 모퉁이에 ‘현진건 집터’라 적힌 표지석을 만나게 됩니다. 현진건 집터를 비롯한 이 일대는 세종의 셋째 아들로 시서화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풍류 왕자이자 명품 컬렉터인 안평대군 이용(이용, 1418~1453)의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별서(별장)가 있던 곳입니다.      


어느 날 안평대군은 복숭아나무가 울창한 깊은 골짜기를 거닐며 노는 꿈을 꿉니다. 평소 아끼던 도화서의 화원,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며 도원(桃源)을 그리게 하지요. 안견은 단 3일 만에 안평의 꿈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냅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안평은 그림에 대한 설명을 담은 도원기를 썼고 꿈에서 자신과 동행했던 박팽년을 불러 서문을 짓게 하고 신숙주, 이개, 정인지 등 당대 최고의 문인 21명으로부터 찬문을 받지요. 이렇게 해서 길이가 무려 20m에 달하는 거작이 완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미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道)>입니다.         


안견이 3일 만에 완성한 <몽유도원도>입니다. (일본 텐리대 소장, 출처: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미술 오천 년)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의 도원기입니다. 정교하면서도 호리호리한 필체가 바람에 날리듯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평은 지금은 서촌이라 불리는 수성동계곡 근방의 자신의 집 주변을 산책하다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3년 전 꿈속에서 본 도원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지요. 꿈속에서 본 도원과 흡사한 그곳에 별서를 짓고 '무계정사'라 불렀는데요 그곳이 바로 부암동 서편, 바위에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는 무계동입니다. 그러니 무계동은 <몽유도원도>의 실사판인 셈입니다. 안평은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 예술가들과 교우하며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발전시켜 나가 ‘안평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합니다. 명 황제도 감탄해 조선에 온 사신들이 안평에게 글을 써달라고 간청했을 정도라고 하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글씨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안평을 비롯해 단종에 절의를 지킨 학자들은 수양대군(세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亂, 1453)으로 화를 당했고 이 때문에 안타깝게도 안평대군의 수집품과 작품들은 불에 태워지거나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무릉도원의 이상향을 꿈꾸었지만 안평의 마지막은 자신의 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몽유도원도>는 더욱 강렬하게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무계정사가 사라진 무계동에 500년이 훌쩍 지나 남루한 차림의 한 사내가 찾아듭니다. 그는 '일장기 말소사건' (1936)을 일으킨 죄목으로 1년간 복역하고 기자로 재직 중이던 동아일보에서 실직한 후 이곳으로 들어옵니다. 생계를 위해 무계동 산기슭 땅을 빌려 양계장을 열고 닭을 키웠지만 그보다 그는 소설을 쓰는 일에 더 매달립니다. 무계동에서 집필한 역사소설 <무영탑>과 <흑치상지>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 사내의 이름은 바로 빙허 현진건(1900~1943)입니다. <운수 좋은 날>, <빈처> 등 우리나라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만든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 운동을 소재로 한 것을 문제 삼은 총독부에 의해 연재가 돌연 중단되고 그의 작품집 <조선의 얼골(굴)>은 금서로 지정되면서 작가로서의 길이 완전히 막혀버립니다. 그가 총독부의 요주의 인물이 된 데에는 일장기 말소사건 말고도 그의 형인 현정건이 독립운동 중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정건이 출소 직후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형수가 이듬해에 자살했으니 현진건의 집안은 독립운동으로 풍비박산 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양계만으로 생계를 해결하기 어려웠던 그는 당시 유행하던 미두(米豆) 선물거래에 투자했다가 이마저도 실패해 부암동의 양계장과 집을 모두 처분하고 지금의 고려대학교 정문 앞 초가로 떠밀리듯 이사를 갑니다. 기자와 작가로서의 삶도 끝나버리고 사업도 망한 그가 삶에 대한 희망의 끈마저 놓아버린 것일까요? 폭음 끝에 44살 젊은 나이에 장결핵으로 세상을 등집니다.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무계정사도 현진건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무계동이라 새긴 바위는 어느 부잣집 마당 안으로 들어가 버려 담장 안을 기웃거려 봐야 보이지 않고, 2003년까지 존재했던 누추한 현진건의 집은 이 일대 11,000㎡ 땅이 소송과 경매에 휩쓸리며 보존은 꿈도 꿔보지 못하고 표지석 하나만 남긴 채 쓸려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그의 호인 ‘빙허(憑虛)처럼 ’ 허공에 의지'한 듯 부잣집 담벼락에 기댄 표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계속 오르막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무계동 삼거리 한 모퉁이 부잣집 담벼락 아래에 '현진건 집 터'라 적힌 표석이 옹색해 보입니다. 저 담장 안쪽에 '무계동' 각자가 있을테지만 철옹성처럼 닫혀 접근이 어렵습니다.


바위에 큼직하게 새겨놓은 무계동(武溪洞) 각자가 이곳이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증명합니다만 이젠 볼 수가 없으니 사진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현진건이 살던 집터’ 표지석에서 200여 m 더 오르면 높은 담장에 웅장한 대문으로 시선을 끄는 집이 나타납니다. ‘반계 윤웅렬 별장’이라 적혀 있습니다. 윤웅렬이 당시 도성 내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유행하자 이를 피해 도성 밖 경승지로 손꼽히는 부암동에 1906년 완공한 별장이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습니다. 원래 벽돌로 지은 2층 서양식 건물이었고 1911년 윤웅렬이 세상을 떠난 후 셋째 아들인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 건물을 추가로 지어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사유지라 개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안내판에, “(......)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근대 건축 양식이 주택에 적용된 흥미로운 사례이며 안채는 서울 근대 한옥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라는 부분도 눈에 띕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의 건축 양식과 가치는 설명해 주고 있지만 이렇게 큰 집을 별장으로 지은 집주인의 내력에 대해선 알려주는 바가 없습니다. 집주인 윤웅렬은 누구일까요?      


윤웅렬(1840~1911)은 고종의 신임을 얻어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인물로 개화파 윤치호의 부친입니다. 한일병합조약(1910) 이후 일본 제국 남작(男爵)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챙겼지요. 작위는 사망 후 장남인 윤치호에게 승계되었습니다. 윤웅렬과 그의 아들 윤치호, 윤웅렬의 동생 윤영렬(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이 맺어진 직후 나라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격랑에 휩쓸리던 그때 국정 운영에 책임이 있는 고위관료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태연하게 지은 호화로운 2층 양옥집. 그 집은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있어 서울시가 나서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해 주고, 일제에 항거한 현진건의 집은 누추해서 보존할 가치가 없다며 쓸어버린 이 세태가 참 부끄럽습니다.     


윤웅렬의 별장은 사유지라 관람이 불가하다 합니다. 그저 웅장한 대문 앞에서 100년 전 저 문을 드나들던 인물들을 상상해 볼 뿐입니다. 


무릉도원을 닮은 아름다운 경관의 무계동은 이제 흔적도 없습니다. 계곡은 모두 시멘트로 덮여 길이 되었고, 무계동 끝자락 가장 높은 언덕에 자하미술관이 무심하게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지요. 주변 경관과 어울릴 생각은 애초에 없는 듯 콘크리트로 멋없이 지은 미술관을 뒤로하고 내려다보는 광경은 와~ 탄성이 나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뚝 솟은 북한산이 넉넉히 자락을 내어준 평창동이 저 멀리 보이고, 손에 잡힐 듯한 북악산 아래에는 성벽에 기댄 성곽마을 부암동이 옹기종기 정겹습니다. 산기슭을 오르느라 송골송골 맺힌 땀을 어느샌가 바람이 말려줍니다. 안평도 현진건도 사랑했을 무계동의 바람이겠지요.     


인왕산 기슭 자하미술관에서 바라본 부암동 전경입니다. 오른쪽 북악의 산등성이를 성곽이 구불구불 기어오르고 그 성곽 밖으로 옹기종기 정겨운 마을, 부암동이 펼쳐지지요.

       

부암동 올 때 자주 들르는 일본인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소박한 일본가정식 식당이 있습니다. 이곳까지 온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카레우동 맛은 기가 막힌답니다.


부암동의 '무계동' 다음 편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삼계동'과 '백석동천'입니다.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소개하려면 어서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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