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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Jul 30. 2024

강진만의 선물, 청자와 바지락

오래 느긋하게 머물 강진 2


강진군은 한반도 땅끝, 전라남도 서남쪽 바닷가에 위치합니다. 바다가 육지 깊숙이 파고들어 온 강진만을 사이에 두고 바지를 탁 펼친 듯 생겼지요. 탐진강을 비롯한 여러 강이 처음 바다와 만나는 강진만은 예나 지금이나 이곳 사람들의 시름을 달래주는 감성적인 풍광이자 치열한 삶의 터전입니다.


지금은 길이 좋아 서울서 강진까지 부지런히 달려 4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옛사람들에게는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장장 480km를 걸어야 하는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지요. 그 길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 하멜과 32명의 네덜란드인이 14일간 밤낮으로 걸었던 호송길이었고, 천주교를 믿었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실학자 정약용의 비통한 유배길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서부터 강진까지 호기롭게 장거리 운전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이젠 목포나 나주 혹은 광주까지 고속철도를 이용하고 강진까지 차를 빌려 가는 방법을 주로 택합니다. 남도의 보드랍고 둥근 능선, 막힘없는 스카이 라인, 평화로운 농촌 풍경에 해방감을 느끼며 뾰족했던 도시 생활자의 눈과 마음어느새 둥글둥글 부드러워집니다. 삐죽삐죽 솟은 월출산이 그 위용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월출산(해발 809m)은 등 비늘을 세운 용처럼 남도의 산이 그저 보드라울 줄 알았냐고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다. 나주나 광주에서 출발해 북동쪽으로 들어갈 때 용의 자태는 더 웅장하고 더 극적으로 다가오지요. 신비로운 조형미에 감탄하며 월출산을 휘몰아치듯 돌아 강진 땅으로 들어섭니다.

   

월출산 남쪽자락 강진 차밭에서 본 월출산의 모습입니다. 그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사진으로 대신하기엔 역부족이군요. ㅡ.ㅡ


강진읍을 지나 땅끝 마량항까지 강진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23번 국도는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청자로’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강진만 일대에서 만들어진 청자를 개경까지 실어 나르던 500km 뱃길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고요한 강진만 바다는 햇빛 속에 춤추듯 일렁입니다. 바닷물이 빠지고 나면 풍요로운 갯벌은 꿈틀꿈틀 망둥이와 바지락, 꼬막의 천국이 되지요. 강진만이 선물하는 흥취에 젖어 달리다 보면 어느새 고려 시대 관요(官窯)가 있던 청자의 고향, 대구면에 도착하게 됩니다.


청자로를 달린다면 고바우공원 전망대에 들러보세요~ 낮엔 햇빛에 반짝이며 춤추는 강진만을, 해 질 녘엔 아름다운 노을을 만날테니까요~


관람이 가능한 사당리 41호 청자 가마터로 곧장 향합니다. 이 가마터는 1970년대 발굴조사 때 순청자와 상감청자 파편이 함께 출토되어 청자의 절정기인 12C에 운영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번 축조한 가마를 계속 사용할 수는 없어서 여러 번 개·보수한 흔적도 발견됩니다. 가마의 천정도 벽도 사라졌지만 천년 전 가마, 그것도 가장 절정기의 청자 가마터를 보고 있자니 그곳에 불을 때는 불꽃보다 더 빛나는 고려 도공의 눈빛이 떠올라 마음이 술렁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 경사면을 이용해 흙으로 쌓아 올린 오름가마입니다. 가마 끝까지 1200~1300도의 온도를 고루 유지하기 위해 15~20도 정도 경사지게 만들었지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불꽃의 성질을 이용한 것입니다. 고려청자를 명품으로 만드는 한 끗은 열기를 다스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청자의 푸른 빛깔은 가마 안 산소를 통제하는 것으로 가능해집니다.


이는 가마 안 산소를 줄여 도자기 자체의 산소를 끌어다 쓰는 방식(환원 소성)으로, 도자기가 산소를 빼앗기면 흙 속 철 성분이 산화되지 않고 철의 본래 색인 푸른색이 나오게 되는 원리이지요. 이렇게 가마 안의 산소를 조절하는 것은 당시 최고의 하이테크였습니다. 현재 전하는 국보·보물급 청자의 80%가 이곳 대구면 일대에서 제작되었으니 이곳은 고려의 국가 첨단산업기지와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지요.     


대구면 사당리 41호 청자 가마터와 이를 토대로 재현한 강진요입니다. 전통 방식대로 불을 지펴 청자를 구워내는데 작품 성공률이 30%에 불과할 만큼 어려운 작업입니다.


하지만 12~13C에 절정을 맞이한 청자는 14C에 이르러 급격히 쇠퇴합니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극심해져 해안 20km 안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바닷가 청자 가마는 폐쇄되고 도공들은 내륙으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마침내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섰고 고려 지배층의 몰락한 운명처럼 그들이 사랑했던 청자도 점차 잊혀 버립니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검박미를 자랑하는 분청사기와 백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강진군 대구면 일대에서 발견된 188개의 청자 가마터와 청자 파편들은 이곳이 고려 전 시기(10∼14C)에 걸쳐 청자를 제작하던 곳임을 알게 해 줍니다. 청자의 편년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기에 대구면에 고려청자박물관을 열어, 이곳에서 발굴된 파편을 전시하고 시기별 청자의 발전과정, 제작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청자 빚기를 체험하거나, 청자 판매장에서 맘에 쏙 드는 예술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강진산 청자를 득템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지요~^^


고려청자박물관 입구에 세련미 넘치는 청자와 청자세면대가 무척 이색적입니다. 햐~ 갖고 싶다~~~
장식용 청자뿐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해도 좋을 실용적인 청자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눈호강 후 착한 가격에 모셔온 디저트용 접시랍니다.^^




그런데 청자의 수요가 늘어난 것은 차(茶) 문화와 관련성이 큽니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왕실이나 사찰에서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의식과 함께 차를 마시는 문화가 성행했는데 이는 불교문화를 꽃피운 고려 시대에 만개합니다. 그러나 고려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어오던 차 문화의 맥락은 조선 시대 들어 급격히 쇠퇴합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조에 따라 불교가 억눌리고 검소한 생활을 미덕으로 삼는 풍조가 더해져 차를 마시는 기호뿐 아니라 청자 다구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진 것이지요. 차에 대한 무관심 속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다도는 비로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강진에서 르네상스를 맞이합니다. 그 중심에 강진으로 유배와 18년을 보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있다니 더욱 놀랍지요? 


그는 만덕산 기슭 다산초당에 머물며 직접 차를 만들기도 하고 제다(製茶) 법을 제자들에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어느 날 다산은 월출산 등반에 나섰다 하룻밤 유숙한 이덕휘의 백운동 별서에서 그의 어린 아들 이시헌을 만납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차문화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요. 다산의 제자가 된 이시헌은 글공부뿐 아니라 제다법을 익혀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한 후에도 노쇠한 스승을 위해 차를 만들어 올려 보냅니다. 그런데 이시헌의 후손들이 여전히 월출산 아래에서 차를 만들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니 더욱 놀랍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강진 차문화의 산실, 월출산 아래 아름다운 백운동 별서와 강진차밭으로 가보겠습니다.


참, 그전에 강진만 찰진 갯벌에서 채취한 군침 도는 바지락 회무침 맛 좀 보고 가실까요?^^    


찰진 강진만 갯벌에서 살찌운 통통하고 쫄깃한 바지락을 이렇게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니 그저 행복합니다. 허름한 외관의 식당이지만 저의 최애 식당 중 하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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