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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Nov 13. 2024

안녕하세요, 조선 미인님?

대구 간송미술관에 갑니다.

그녀와의 첫 만남.

가는 눈썹과 초승달 눈매, 갸름한 얼굴선이 곱습니다. 부드러운 눈동자, 앙증맞은 붉은 입술, 목선 아래 둥근 어깨와 잘록한 허리, 치마를 지나 버선코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단아한 선이어서 놀랍습니다. 섬세하게 붓질된 가채와 쪽빛 치마에서는 풍성한 볼륨감이 느껴지고, 삼회장저고리는 세련미가 흘러넘칩니다. 가련하고도 당당하고, 유혹하는 것 같지만 되려 무심하며, 순진한 것 같아도 세상 좀 알 것 같은 오묘한 매력의 그녀는 모나리자보다 더 알 수 없는 표정과 눈빛을 지녔지요.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는 그녀는 바로 조선 여인의 사실성을 담은 최초의 그림, ‘미인도’(신윤복, 18C말~19C초)의 주인공입니다.

그녀를 직접 마주한 기쁨에 나도 모르게 인사를 건네지요.

“안녕하세요? 조선 미인님?^^”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신윤복의 '미인도'를 미인의 고장으로 이름난 대구에서 만납니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관람의 턱이 높은 편입니다. 봄·가을 두 차례 열리는 정기 전시를 보기 위해서는 늘어선 줄을 마다하지 않을 시간과 열정이 필요하니까요. 매번 놓쳐버리던 차에 ‘대구 간송미술관’(분관) 개관을 기념하는 전시 소식에 눈이 번쩍 뜨였지요. 간송미술관의 대표 컬렉션인, ‘미인도’(보물), 『훈민정음』해례본(국보),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을 위시한 국보와 보물 40건 97점이 대구로 향했으니까요. ‘여세동보(與世同寶)’라는 전시명처럼 그야말로 세상 함께 지극한 보배의 향연이 펼쳐지는 셈이지요. 이는 간송미술관이 개최한 역대 전시 중 최대 규모의 국보와 보물이 출품되는 전시입니다. 일찌감치 전시 예매를 해두고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합니다.      


우선 미술관 건물의 웅장함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콘크리트 지붕을 떠받치는 시원스럽게 뻗은 나무 기둥 사이를 지나 미술관으로 들어서지요. 인산인해. 평일 오후이지만 간송 컬렉션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모두 5개의 전시실에서 보배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지요. 무엇을 먼저 보든 상관없어서 관람객 분산 효과가 있어 좋습니다.     


1 전시실의 인기 스타는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와 신윤복(申潤福, 1758~?)입니다. 워낙 교과서나 매체를 통해 익히 알려진 그림들이어선지 인기가 높습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은 당대 사회상을 담은 기록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김홍도가 농민의 생산 활동을 주로 그렸다면 신윤복은 한양의 도시풍경이나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신윤복의 풍속화첩,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18C말~19C초, 국보)은 빙글빙글 줄을 서야 할 정도로 관람객들의 관심이 뜨겁지요.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이 설렘과 흥분 가득한 모습입니다. 킥킥대며 나무 뒤에 숨어 멱감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동자승(‘단오풍정(端午風情)’)이나, 빨래터 여인들을 흘깃거리는 선비의 모습(‘계변가화(溪邊佳話)’)에서는 나도 모르게 상상력이 발동합니다. ‘월하정인(月下情人)’의 남녀가 달빛 아래 ‘썸’ 타는 모습도 연극이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실적입니다. 노랑 저고리와 샛빨간 치마의 색감도 눈을 즐겁게 합니다. 기생과 한량의 사랑놀이를 과감하게 표현하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그림에 버젓이 남겨놓았으니 당시 사회상에 비추어 볼 때 너무 획기적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의 솔직하고 풍자적인 풍속화는 당시에는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래서인지 옛 기록에서 신윤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덕에 그는 조선의 화가 중 가장 신비스러운 화가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실제 존재하는 인물인 듯 생생한 신윤복의 풍속화입니다.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 후기 풍속화가 중 한 사람인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긍재전신첩(兢齋傳神帖)>(18C말~19C초, 보물)의 인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튀는 순간 이를 쫓던 양반이 담뱃대를 든 채로 마루에서 굴러 떨어지는 한바탕 소동의 순간을 포착한 ‘야묘도추(野猫盜雛)’를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납니다.  이번엔 ‘야장단련(冶匠鍛鍊)’을 볼까요? 화덕에서 막 꺼낸 벌건 쇳덩이를 붙잡고 있는 대장장이가 관람객을 흘깃 쳐다봅니다. 당장이라도 관람객을 향해 말을 걸 것만 같군요. 이때 다른 대장장이가 날렵하게 쇳덩이를 향해 망치질하려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김득신은 아마도 대장간의 생생한 현장감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는 동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닌 화가임에 틀림없습니다.     


동적인 순간을 낚아채 듯 포착해 낸 김득신의 풍속화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1 전시실 관람이 끝나갈 즈음에는 파리 오랑주리미술관의 가로로 긴 대작 '수련'(클로드 모네) 보다 더 감동적인 명작이 소개됩니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촉잔도권(蜀棧道券)>(1768, 보물)인데요, 가로 8m가 넘는 긴 그림으로 장대한 촉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담은 그림입니다. 잔도란 험난한 벼랑 끝에 선반처럼 내어 단 길을 이르는 말인데 끝없이 이어진 위험한 길을 인생에 비유한 작품입니다. 명문 사대부 집안이었던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몰락한 뒤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을 그림에 정진한 인물인 심사정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슬아슬한 바위산과 협곡을 무사히 지나 드디어 평탄하고 평화로운 마을에 이르게 됩니다. 해피 엔딩이지요.^^ 의미까지 좋아서 자꾸 보고 싶어지는 걸작입니다.   

   

등장인물들은 험난한 촉산의 잔도를 지나는 아슬아슬한 여정을 마친 뒤 이윽고 평탄한 마을에 이르게 되지요. 이 그림은 소상히 보아야 제 맛입니다. (심사정의 '촉잔도권'의 전반부)


2 전시실신윤복의 ‘미인도’(18C 말~19C 초, 보물) 단 한 점입니다. 한 점의 그림이 주는 아우라가 전시실을 가득 채우니 신비롭지요. 조선 미인을 독대한 관람객들의 입에서 나지막이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3 전시실 『훈민정음』해례본(1446, 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단 한 권이 역시 엄청난 존재감으로 방을 채웁니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으로 그 이전까지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훈민정음이 어떤 원리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훈민정음』해례본(1446, 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실물입니다.


4 전시실에서 만난 보배는 황홀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瓷象嵌雲鶴文梅甁, 13C, 국보)’입니다. 청자 매병 중 으뜸으로 치지요. 사진으로 대신할 수 없는 당당한 형태미와 정교한 문양에 압도되어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눈길을 사로잡은 또 다른 도자기는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白瓷靑畵鐵彩銅彩草蟲蘭菊文甁, 18C, 국보)'입니다. 이름이 어지간히 깁니다.^^ 끊어서 한번 읽어볼까요?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라고 읽어봅시다. 뜻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 도자기가 온갖 기법과 문양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자 바탕에, 코발트 푸른 안료와 검붉은 색의 철화 안료와 붉은 동화 안료를 사용해 풀과 나비, 난초와 국화 문양을 그려 넣은 병’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백자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안료인 코발트·철·구리는 최상의 빛깔을 내기 위한 굽는 온도가 각기 달라서 한 번에 사용하기에는 기술적으로 매우 까다롭습니다. 따라서 이 백자는 조선백자의 절정기에 도달한 작품이지요.       


상감기법으로 구름과 학을 정교하게 새겨넣은 청자와 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을 사용해 제작한 백자의 당당한 자태를 감상하시지요.


마지막 5 전시실에 이르면 장중하고도 아름다운 말로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선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요 소장 그림들을 미디어아트로 만든 영상, <흐름>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지극한 보배를 가진 우리 민족의 문화 역량이 자랑스러워 가슴이 웅장해집니다.


마지막으로 5 전시실에서 산수화에 등장하는 산 모양 의자에 앉아 미디어아트 <흐름>을 감상하니 감동은 배가 됩니다.   




이곳에 모인 이토록 대단한 우리 민족의 예술품은 단 한 사람,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의 컬렉션입니다.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강점기에 문화유산인들 온전할 수 있었을까요? 어려움 속에서 전 생애와 재산을 바쳐 문화유산을 모으고 지켜낸 간송에 대해 알아보아야겠지요?


그는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葆華閣, 1938)의 설립자입니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아 '조선거부 40인'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요. 그가 상속받은 부동산 중에 논의 면적만 무려 800만 평이 넘었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10배에 달합니다. 이곳에서 매년 2만 석 이상의 쌀을 수확했고, 그 밖에도 밭과 상가, 상권 등 많은 것을 물려받았지요. 휘문고보를 거쳐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간송은 그때부터 문화재를 구입하기 시작합니다. 문화재 수집과 보존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대학 재학 시절 그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을 만난 것은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위창을 통해 민족문화 수호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화 골동의 감식안을 키울 수 있었으니까요. 위창은 한학과 금석 고증학, 서예 전각의 대가이면서 서화 골동의 대감식가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순황, 일본인 심보기조(新保喜三) 같은 정직한 중개인이 있었기에 조선의 소중한 문화재들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요. 수집 과정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해드립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간송 전형필, 다섯 번째가 스승인 위창 오세창입니다. (간송미술관 제공)


정선이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은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머슴이 불쏘시개로 쓰기 직전 골동품상에 의해 가까스로 건져졌고 이를 간송이 사들여 수장함으로써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시작됩니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의 만여 평 땅을 구입, 북단장(北壇莊)이라 이름 짓고 본격적인 문화재 수집에 몰두하게 되는데요.


1935년에는 일본 상인 마에다 사이이치로가 소장하고 있던 청자 매병의 으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2만 원에 사들여 당시 골동계를 놀라게 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이 천 원 정도였으니 기와집 20채 값이라는 거금을 내고 구매한 셈이니까요. 그 후 무라카미가 산 값의 두 배에 되팔기를 권했지만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면 팔겠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합니다. 수집 목적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투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936년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명품들을 수집한 해입니다. 화려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 고미술품 수장가인 모리 고이치의 사망 후 경성구락부 경매에 등장합니다. 간송은 이 걸작을 구매하기 위해 당시 세계적인 일본 미술품상인 야마나카 상회와 불꽃 튀는 경쟁을 벌여 1만 4천5백80원에 낙찰받는 데 성공하지요. 대작 '촉잔도권'(심사정)은 간송이 5천 원을 주고 구입한 뒤 수리비로만 6천 원이 들었다는 후문입니다.

그해 가장 큰 수확은 부유한 일본인 상인 도미타 기사쿠에게 넘어가 지극한 보물로 소개되어 그 값이 한정 없이 올라있던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여러 해 노력한 끝에 다른 컬렉터에게 넘어간 것을 되사 온 일입니다.


1937년에는 영국 변호사, 존 개스비(Sir. John Gadsby)가 도쿄에 살면서 수집한 최고 수준의 고려청자를 일본을 떠나면서 모두 간송에게 넘겨줍니다. 간송은 이를 위해 공주에 있는 5천 석 지기 전답을 모두 처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일로 간송은 세계 최고의 고려 도자기 컬렉션을 가지게 됩니다. 또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시한 가격인 1천 원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며 1만 원을 더해 1만 1천 원을 내주면서, ‘1천 원은 수고비요.’ 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지요.


이 모든 보배들을 수장하게 된 간송은 드디어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을 설립했고 위창은 그 기쁨을 보화각 머릿돌에 이같이 새깁니다.

‘......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보화각은 간송 타계 3년 후인 1965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됩니다.


탄과 감동의 시간을 보내고 기념품 샵에서 전시 도록까지 구입해 미술관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는 숨어버렸고 서쪽 하늘에 붉디붉은 노을이 장관입니다. 이토록 눈호강을 누린 것에 감사하며 서울행 기차에 올랐지요. 자랑스러움과 감사의 하루였습니다. 이 전시는 대구 간송미술관에서 2024. 9.3~12.1까지 계속됩니다. 부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호화로운 보배들의 향연을 만끽하길 바라봅니다.

참, 서문시장에서 대구인의 소울푸드인 '납작만두'를 후다닥 해치운 것을 빠뜨릴 뻔했군요.^^ 어딜 가든 먹는 것을 빼놓지 않는 크레마입니다.^^   


자랑스러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해는 숨어버리고 붉은 노을이 장관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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