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로의 초대 1
강성했고 세련된 문화를 가졌던 나라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협공에 무너집니다. 660년,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이 수모를 겪으며 당으로 끌려갔고 수도인 사비는 당군이 지른 불로 일주일 내내 활활 불탔지요. 하지만 700년 역사의 백제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백제 땅 곳곳에서 부흥군이 일어나 나당연합군을 거세게 밀어붙였으니까요. 임존성과 주류성을 거점으로 한 이 저항은 3년간 계속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백제 땅을 지배하려던 당의 야욕을 무산시킵니다. 왜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돌아와 왕위를 회복하자 부흥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집니다. 하지만 주류성의 지도자 복신이 정신적 지도자 승려 도침을 살해하고, 복신 자신은 다시 부여풍에게 살해당하는 등 지도층에 일어난 내분은 승승장구하던 부흥군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고 맙니다.
663년 8월, 백제부흥군은 백강 입구에서 신라군(3~50,000명)과 당군(17,000명, 함선 170척)을 만나 마지막 결전을 치릅니다. 이에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파병을 결정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백제와 함께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고 있던 고구려였을까요? 하지만 고구려도 당과의 일전을 벌이고 있던 터라 파병은 쉽지 않았지요. 즉각 군대를 보낸 나라는 바로 왜입니다. 이 백강전투에 27,000명을 투입했고 곧 10,000명을 추가 파병했다고 『일본서기』는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661년 부여풍을 호위해 백제땅으로 온 5,000명을 포함하면 최대 42,000명의 지원군이 왜로부터 백제부흥군을 도우러 온 셈입니다. 사람만 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가지고 온 화살, 곡식, 피륙, 말, 선박(약 1,000척) 등의 규모까지 고려한다면 당시 고대국가로 진입하지 못한 야마토정권의 일본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파병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중·일 동아시아 세 나라가 참전한 최초의 전쟁인 이 놀라운 전투는 우리나라에서는 백강전투(白江戰鬪), 중국은 백강구전투(白江口之战), 그리고 일본에서는 백촌강전투(白村江の戦い)라 부릅니다.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
우리나라『삼국사기』와 중국의 역사서, 신·구『당서』와『자치통감』은 백강전투의 참혹함을 이처럼 전하고 있습니다. 백강전투는 백제부흥군과 왜군의 참패로 끝났고, 곧이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도 함락됩니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지요. 백제 왕족과 귀족 등 20만 명의 유민은 바다를 건너 왜로 망명했고, 왜는 1만 명의 군사와 함선 400척, 말 1,000 필의 손실을 입었을 뿐 아니라 신라, 당과의 대립으로 정치적 위기까지 맞이합니다. 이에 결집된 힘을 내어 대항하기 위한 중앙집권화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다이호 율령을 제정(701)하고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면서 빠르게 국가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일본 역사에서 백강전투가 갖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중·일 삼국의 최초 격전지, '백강'과 부흥군의 마지막 본거지, '주류성'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금강 하구와 충남 서천군의 건지산성'이 유력한 후보였으나, 최근 들어 '동진강 하구와 전북 부안군 우금산성'이 강력한 후보로 떠오르고 있으니까요.
이곳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안선이 돌출되어 있는 부안이 위치한 변산반도는 백제 수도인 웅진성(공주)과 사비성(부여)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백제의 대중국, 대왜 사절선이 빈번히 드나들던 대외 교역의 창구이자 해상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변산반도 가장 서쪽 절벽(격포)의 제사 유적인 죽막동유적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지요. 죽막동유적은 조난의 위험이 큰 격포까지 무사히 들어온 사람들이 감사의 제를 올리거나 앞으로의 무사 항해를 비는 제사를 올렸던 곳입니다. 부안의 북쪽, 동진강을 백강으로 비정하는 학자들은 이곳이 남쪽에서 오는 왜의 지원군이 들어오기에 금강보다 가깝다는 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이 백강과 많이 멀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금산성이 주류성이라는 주장을 더합니다. 서천군의 건지산성에 비해 우금산성이 규모가 더 크고, 왜의 지원군과 연계하기에 좋은 위치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미 망한 나라 백제에 일본은 왜 사활을 건 대규모 지원군을 보낸 것일까요? 신라와 손잡은 당의 국력이 최강인 상황에서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 일은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또 하나의 의문은 이상하게도 3개국의 옛 사서에서 소상히 다루고 있는 이 백강전투를 우리나라에서는 주목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일까요?
(고대 일본을 지배한 야마토정권의 근거지인 아스카, 나라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다음 글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