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OOO 중입니다.
5년차 마케터 인생에서 대기업 인하우스, 외국계 대행사, 광고종합대행사를 거쳐
스타트업에 입사했던 게 딱 두 달 전.
체계가 없어 니가 다 만들어야 한다.
연봉이 높을 것이다. 사람을 잡아둘 수 있는 게 연봉 하나 뿐이니까...
퇴근을 일찍해도 불안하고 늦게하면 화낼 힘도 없을 때가 올 것이다.
모두 스타트업에서 열정을 불사르는 내 주변 열정맨들이 해준 이야기었다.
걱정 반 설레임 반으로 출근했던 첫 날 책상에 놓여있던 명함을 보는데
눈알이 튀어나올 뻔 했다.
팀장? 내가? 나 방금 우리 팀 팀장님 인사 주고 받지 않았나?
한 팀에 팀장이 두 명일 수 있나?
전 직장에서 대리였던 내가 이 세계에선 팀장이라고?!
무슨 라노벨 같은 상황인가 했으나 정말이었다.
2022년엔 새로운 팀을 구성할 생각이며, 지금 있는 팀에서 잘 적응해 일을 좀 배운 뒤
팀을 분사해 꾸리겠다는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파도처럼 부서지는 마음과 마주했다.
그걸 왜 면접 볼 때 얘기를 안해주고 2022년 나만의 새해다짐처럼 말하는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손을 꼽아봤다.
스타트업에 들어오면 힘든 점 세 가지 중에서 이미 두 가지가 '단 하루만에' 실현된 것이다.
체계라는 것은 대표의 불렛저널이 가끔 비공개에서 공개로 바뀔 때야 느낄 수 있는 것.
첫날부터 제안서 작업으로 새벽 1시가 되어서야 택시로 퇴근하고 있는 멀미 100% 수치의 나.
그 다음날은 더 가관이었다.
기획을 수정하는 방향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낸 후 수긍의 말을 들어서
실제로 문서화까지 해놓았더니 공유 폴더에서는 삭제되었다.
뭐지. 이거 판옵티콘인가.
공유 폴더 삭제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는 있었지만
짐작에서 확신으로 바뀌어서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 유치한 수작이었다.
실행해본 적 없는 이전의 수치들을 정리해 연말 결과보고서를 작성 완료한 것은 다른 사원의 이름으로 발송되었다.
이쯤되면 대리각을 꽁으로 먹진 않았기에 판단이 선다.
혹자가 말하는 M세대의 특징과 함께, 이런 데서 버텨봤자 이득이 있냐.
3개월 딱 다니고 실업급여 받아야지.
그리고 그 이후 딱 지지난주 대표의 개인 면담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이 부서지는 듯 했다.
정리하면,
" 우리와는 업무 핏이 좀 안 맞는 거 같아. 서로에게 불편한 상황보다는 다른 데 찾아보는게 띵킹씨한테도 좋지 않겠어? "
방심했던 내 인생과 커리어에 총을 쏘는 느낌이었다.
월급쟁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병에서 을정도로 바뀔 때가 바로 퇴직을 말할 때일진대,
나에게는 그런 카타르시스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내 삶을 내가 책임진다는 나 자신의 유일한 자기확신을 위해서 웃으며 말했다.
공감합니다. (=더럽고 치사해서 나도 안다닌다)
그러나, 사람을 데려오는 데에도 필요한 게 있는데 (=이 회사 오기전에 나도 갈만한 회사 꽤 있었고)
가는 데도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지요. (=너때문에 포기했는데 한달치 월급이라도 받아야겠다)
홀리데이 위크에는 이직도 쉽지 않은 기간이라 (=사람 뽑아놓고 맘에 안드니 바로 자를 거 왜 뽑음?)
바로 퇴직서 쓰고 나가기엔 저도 무리입니다. (=우리 마지막은 좀 아름다워보자)
그리고 퇴근하고 오는 길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사와서
딱 세 입 마시고 퇴사인사 이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한 번 읽고 출근해서 팀 내 모든 사람들에게 커피를 돌리고 일대일로 퇴사를 알렸다.
판옵티콘의 대리자가 무슨 수작질을 부릴 지 모르니까 내가 얘기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시 한번 퇴사인사 이메일을 읽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부서지는 마음에도 자기검열을 해야하는 날이 있다면 그게 바로 오늘일 것이다.
두 달도 다니지 못하고 권고사직하는 회사에 무슨 애정과 관심이 남아있겠냐만은 그럼에도 내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라는 나름의 자기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뛰어놀 놀이터의 땅을 보기도 전 공중제비를 돌라는 요구에 내가 응했다면,
몸이 심하게 다쳤을지도 모를 것이다. 멀리 뛰기 한 번을 아무도 봐주지 않는 외로운 곳에서
내가 무언가를 얻기위해 낭비할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쓴다면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는 확신도 있다.
누군가 회사라는 놀이터가 당신에게 생채기를 남겼다면, 당신도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똑같은 놀이터에 방문하는 내가 조금 달라지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계속 갈 것이다. 앞으로.
그래서 나는 나아가는 중입니다. 앞으로.
2021.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