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결과가 앞서고 판단이 늦어지는 순간들
AI를 다루기 시작한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면서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작업은 빠르게 시작된다.
브리프를 듣고,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곧바로 이미지가 나오고, 영상이 만들어진다.
“일단 좀 뽑아봤어요.”
그 말과 함께
폴더 하나가 공유된다.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시안이 들어 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속도도, 반응도, 성실함도 분명하다.
과거와 비교하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변화다.
하지만 다음 질문 앞에서
대화의 리듬이 흔들린다.
“그래서 이 중에서 뭘로 가는 건가요?”
잠깐의 침묵이 생기고,
누군가는 다시 이미지를 만든다.
누군가는 기존 시안을 조금 바꾼다.
누군가는 “이런 느낌도 가능해요”라며
새로운 결과를 더한다.
폴더는 점점 두꺼워진다.
방향은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 과정은
대충 일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너무 빠르게 반응하고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AI는 가능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놓는다.
그 결과 앞에서 디자이너는
“혹시 이걸 놓치면 안 되지 않을까”라는 불안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선택보다
추가가 먼저 일어난다.
이때 만들어지는 결과물들은
흔히 ‘슬롭’이라고 불린다.
정제되지 않았고,
방향성이 모호하며,
어디까지가 실험이고 어디부터가 결정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의 산출물들.
하지만 이 슬롭은
무능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출발점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달리기 시작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중간 지형에 가깝다.
상사는 말한다.
“AI면 이 정도는 금방 나오잖아요.”
디자이너는 그 기대에
성실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가능한 걸 다 만들어봤어요.”
이 사이에서
슬롭은 계속 쌓인다.
누구도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대화 안에는
무엇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인지,
무엇을 버리기 위한 시도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슬롭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 양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 위에
질문이 놓이지 않을 때다.
이 시안은 어떤 가정을 시험했는가.
이 결과로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 질문이 등장하지 않는 한,
슬롭은 계속 늘어나고
결정은 계속 뒤로 밀린다.
AI는 결과를 만들어주는 속도를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결과들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