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슬롭을 쏟아내는 사람들

AI 시대, 결과가 앞서고 판단이 늦어지는 순간들

by Yooseob

AI를 다루기 시작한 디자이너들과 함께 일하면서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작업은 빠르게 시작된다.

브리프를 듣고,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곧바로 이미지가 나오고, 영상이 만들어진다.


“일단 좀 뽑아봤어요.”


그 말과 함께

폴더 하나가 공유된다.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시안이 들어 있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속도도, 반응도, 성실함도 분명하다.

과거와 비교하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변화다.


하지만 다음 질문 앞에서

대화의 리듬이 흔들린다.


“그래서 이 중에서 뭘로 가는 건가요?”


잠깐의 침묵이 생기고,

누군가는 다시 이미지를 만든다.

누군가는 기존 시안을 조금 바꾼다.

누군가는 “이런 느낌도 가능해요”라며

새로운 결과를 더한다.


image37.jpg


폴더는 점점 두꺼워진다.

방향은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는다.


이 과정은

대충 일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너무 빠르게 반응하고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AI는 가능한 모든 것을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놓는다.

그 결과 앞에서 디자이너는

“혹시 이걸 놓치면 안 되지 않을까”라는 불안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선택보다

추가가 먼저 일어난다.

이때 만들어지는 결과물들은

흔히 ‘슬롭’이라고 불린다.


정제되지 않았고,

방향성이 모호하며,

어디까지가 실험이고 어디부터가 결정인지

분명하지 않은 상태의 산출물들.


하지만 이 슬롭은

무능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출발점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달리기 시작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중간 지형에 가깝다.

상사는 말한다.


“AI면 이 정도는 금방 나오잖아요.”


디자이너는 그 기대에

성실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가능한 걸 다 만들어봤어요.”


이 사이에서

슬롭은 계속 쌓인다.


누구도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대화 안에는

무엇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인지,

무엇을 버리기 위한 시도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슬롭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 양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 위에

질문이 놓이지 않을 때다.


이 시안은 어떤 가정을 시험했는가.

이 결과로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 질문이 등장하지 않는 한,

슬롭은 계속 늘어나고

결정은 계속 뒤로 밀린다.

AI는 결과를 만들어주는 속도를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결과들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판단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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