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사변디자인, 판단을 설계하는 오래된 방법

선택의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by Yooseob

AI를 다루는 디자이너들과 일을 하다 보면

비슷한 질문에 자주 멈춰 서게 된다.


“이 중에서 뭘 골라야 할까요?”

“이게 더 좋아 보이는데, 맞는 방향일까요?”


결과는 충분하다.

시안도 많고, 변주도 풍부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택의 순간마다 공기가 무거워진다.


문제는 아이디어의 부족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실무에서 사라진 질문들


AI 이전의 디자인 프로세스에서는

자연스럽게 던져지던 질문들이 있었다.


이 작업은 무엇을 전제로 시작되었는가

지금 만드는 것은 ‘현실적인 해답’인가, ‘가설’인가

이 결과는 무엇을 검증하기 위한 것인가


하지만 AI가 작업의 속도를 앞당기면서

이 질문들은 자주 생략된다.


곧바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만들고 나서 의미를 붙이려는 유혹이 커진다.


그 결과

선택은 점점 감각의 문제처럼 취급되고,

판단은 취향이나 분위기의 언어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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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변디자인은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사변디자인(speculative design)이라는 개념이

다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사변디자인은

‘정답을 만드는 디자인’이 아니다.

오히려 일부러 답을 유보하는 디자인에 가깝다.


지금 당장 실현 가능한 해결책보다,

“만약 그렇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이 만들어내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펼쳐 보인다.


사변디자인의 결과물은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판단하기 위해 존재한다.



사변디자인에는 기준이 있다


겉으로 보면

사변디자인은 자유롭고 느슨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명확한 기준 위에서 작동한다.


이 작업은 어떤 전제를 흔들기 위한 것인가

어떤 질문을 관객에게 떠넘기고 있는가

이 결과는 ‘선택’을 요구하는가, ‘사고’를 요구하는가


즉, 사변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질문의 위치다.


무엇을 만들었느냐보다

왜 이 질문을 지금 던졌느냐가 중심이 된다.




지금 실무에 필요한 것은 ‘사변의 태도’다


현재의 실무가 막히는 이유는

사변디자인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사변디자인이 오래전부터 다뤄온

질문 중심의 판단 구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AI는 결과를 빠르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더더욱

이 결과는 어떤 질문에 대한 응답인가”를

의도적으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기준이 없으면

시안은 늘어나고,

결정은 미뤄지며,

워크플로우는 계속 꼬인다.



선택은 감각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선택을 못 하는 팀은

대개 감각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이 너무 많다.


문제는

그 감각들이 어떤 질문 아래 놓여 있는지가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변디자인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디자인은 답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판단이 가능해지는 조건을 설계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개념은 다시 교육으로 돌아온다


이 판단의 기준은

실무에서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질문을 먼저 세우는 태도,

가설로 작업을 시작하는 감각,

결과를 ‘결정’이 아닌 ‘사고의 도구’로 다루는 방식은

교육에서부터 반복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AI 시대의 디자인 교육이

기술을 가르치는 데서 멈추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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